오피니언 사설

원전 사고는 잘못된 정책 탓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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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고리 원전 1호기 사고의 진상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원자력안전위원회의 조사 결과 비상발전기가 작동불능인 상황에서 원자로가 가동되고, 핵 연료 교체작업까지 강행된 것으로 밝혀졌다. 부실 점검과 기록 조작 등 추가 은폐 사례도 속속 확인되고 있다. 이에 따라 감사원 감사와 검찰의 수사는 불가피해졌다. 또한 정부는 24시간 원격 감시시스템을 구축하고, 원전 주재원과 원전 검사 항목을 늘이기로 했다. 하지만 관련자 처벌과 정신 재무장으로 안전이 확보되는 것은 아니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9월의 블랙아웃(정전사태)과 지난달의 원전 사고, 그리고 최근 꼬리를 무는 화력발전소 화재의 공통 분모는 설비 노후화다. 급증하는 전력수요를 대기 위해 무리하게 낡은 설비까지 돌리다 보니 사고가 빈발하는 것이다. 정부와 한국수력원자력은 우리 원전 가동률이 100%에 가깝고 고장 정지율은 연간 0.1건에 그친다고 자랑해 왔다. 뒤집어 보면 그만큼 무리하게 가동한다는 의미다. 생산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으면 원전을 세워야 한다는 ‘안전 제일주의’가 설 땅을 잃게 된다.

 그동안 정부는 전기료를 원가 이하로 억제하면서 발전 관련 공기업들에 효율적 경영을 압박해 왔다. 이들은 고통스러운 임금 삭감보다 유지(維持)·보수(補修) 비용의 절감을 선택하는 쪽으로 몰렸다. 한전의 전기시설 수선유지비는 2008년의 9587억원에서 2010년엔 8334억원으로 매년 600억원 이상씩 감소했다. 실제로 지난 3년간 한전은 4조5000억원의 원가절감을 이뤘다. 바꿔 말하면 그만큼 유지·보수에 소홀해지면서 사고 가능성이 커진 셈이다.

 김쌍수 전 사장은 수차례 “이대로 가면 사고 난다”며 “산업용을 중심으로 전기료를 올려야 한다”고 경고했다. 발전소 실무자들 사이에서도 “설비가 낡아 위험하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히 나돌았다. 이번에 사고가 난 고리 1호기의 비상발전기는 34년이나 된 설비였다. 불이 난 화력발전소인 보령1호기도 28년이나 됐다. 33년이 된 울산화력 5호기는 화력발전소의 평균 설계수명 30년을 훌쩍 넘겼다. 전력수요는 가파르게 증가하는 반면 신규 발전소 건설은 현지 주민들의 반대에 부닥치다 보니 다른 대안이 없다. 보령화력 1·2호기나 울산의 영남발전소처럼 노후 발전소의 수명을 연장하는 무리한 방법이 동원되는 것이다.

 원전 사고는 몇 명의 실무자를 처벌하고 안전 불감증만 치유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왜곡(歪曲)된 전력 정책부터 푸는 게 우선이다. 인위적으로 낮게 매긴 전기료를 정상화하고, 주민 설득을 통해 신규 발전소도 꾸준히 늘려가야 한다. 유지·보수 비용도 삭감 대상이 아니라 안전을 위한 투자다. 현재 가동 중인 설비를 충분히 유지·보수하면서 수명이 다할 경우 과감히 도태시켜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는 위험한 폭탄을 안고 사는 것이나 다름없다. 총체적인 적신호가 켜진 만큼 무리한 운행을 멈추고 정비와 보수에 눈을 돌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