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덕일의 고금통의 古今通義

훈민정음 해례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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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이덕일
역사평론가

『훈민정음(訓民正音)』 서문은 “비록 바람소리나 학의 울음소리, 닭 울음소리, 개 짖는 소리까지 모두 쓸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귀에 들리는 모든 소리는 다 적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현행 한글맞춤법통일안에 따르면 영어의 ‘L과 R’, ‘P와 F’, ‘B와 V’, ‘G와 Z’, ‘E와 Y’를 구분할 수 없다. 우리 사회가 영어 교육에 숱한 투자를 하고도 효과가 미미한 근본적 이유가 훈민정음 창제 원칙을 버린 데 있다.

 세종 28년(1446) 발간된 훈민정음 사용설명서인 『훈민정음 해례본(解例本)』에 따르면 이런 모든 발음을 구분할 수 있다. 세종은 해례본 서문에서 “정음(正音)을 만드는데… 단지 그 소리를 따라 그 이치를 다할 따름”이라고 소리를 따라 적으라고 말하고 있다. 해례본에는 몇 가지 표기원칙이 나오는데 그중 하나가 병서(竝書) 원칙이다. 한마디로 초성(初聲)을 자유롭게 쓰라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L과 R’, ‘G와 Z’ 등의 발음문제가 해결되는데, 예를 들어 L을 ‘ㄹ’로 적는다면 R은 ‘ㄹㄹ’, 또는 ‘ㅇㄹ’ 등으로 구분해서 적으라는 것이다. 해례본의 연서(連書) 원칙에 따르면 ‘P와 F’, ‘B와 V’ 등의 발음문제도 해결된다. 순음(脣音:입술소리) ‘ㅁ·ㅂ·ㅍ·ㅃ’ 아래 ‘ㅇ’을 연서해 ‘ㅱ·ㅸ·ㆄ·ㅹ’ 같은 순경음(脣輕音)을 만들라는 것인데, 예를 들어 B를 ‘ㅂ’로 쓰면 V는 ‘ㅸ’으로 적어 구분하라는 뜻이다.

 세종은 우리 겨레에게 없는 발음이 다른 겨레에게는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세종이 훈민정음으로 한자음을 적는 운서(韻書)에 많은 공력을 들여 『동국정운(東國正韻)』을 만든 것이 이를 말해준다. 세종의 훈민정음 표기 원칙은 1912년 조선총독부에서 고쿠분(國分象太郞) 같은 일인 학자들과 일부 한인 학자들을 시켜 보통학교용 언문철자법(諺文綴字法)을 만들면서 크게 훼손되었다. 여기에 1933년 한글맞춤법통일안에서 ‘ㄹ’이 첫소리가 되지 못하게 하고 일부 모음 앞에서 ‘ㄴ’이 첫소리가 되지 못하게 하는 두음법칙(頭音法則) 따위를 채택하면서 또 훼손되었다.

 지난 100여 년간 가장 많이 퇴화한 언어가 한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종이 만기(萬機)를 친림하는 바쁜 와중에 훈민정음을 만든 이유는 ‘제 뜻을 펴지 못하는 15세기 조선 백성’을 위해서였다. 지금은 ‘제 발음을 펴지 못하는 21세기 대한민국 국민’을 위해 훈민정음 창제정신으로 돌아갈 때다. 소유권 분쟁 중인 『훈민정음 해례본』(상주본)의 물질적 가치에 대해 1조원에서 300억원, 2억원까지 다양한 설이 제기된다. 훈민정음 해례본의 정신적·문화적 가치는 계량할 수도 없다.

이덕일 역사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