펑더화이서 보시라이까지 … 중국 권력 교체기마다 ‘희생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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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가을 중국공산당 18차 당대회를 앞두고 보시라이(薄熙來·63) 충칭(重慶)시 당서기가 낙마했다. 이를 계기로 중국 공산당의 권력투쟁 역사가 새삼 주목받고 있다. 국민당을 몰아내고 집권한 중국공산당은 끊임없는 권력투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때론 유혈 참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중국 사회 발전 방향에 맞게 이뤄진 경우에는 순기능도 없지 않았다. 노선투쟁이 끝난 뒤에는 중국공산당의 단합력이 배가되는 효과도 봤다.

중국공산당은 일당독재체제를 시종일관 고수하고 있다. 8개 정당이 민주당파로 활동하고 있지만 실질적인 노선투쟁은 중국공산당 내부에서 이뤄져 왔다. 승자의 노선은 채택되고 패자는 희생양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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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큰 노선투쟁은 문화대혁명(1966∼76년)을 계기로 벌어졌다. 대약진운동(58년)을 무리하게 추진한 마오쩌둥(毛澤東)은 이에 반대한 펑더화이(彭德懷) 국방부장을 59년 우경기회주의자로 몰아 숙청했다. 중국을 사회주의식으로 개조하려던 마오의 좌파 노선, 이에 반대하는 펑의 노선이 충돌한 것이다. 대약진의 실패와 자연재해가 겹쳐 수천만 명이 희생되자 마오도 권력 일선에서 물러났다. 재기를 노리던 마오는 문혁을 발동했다. 마오가 물러난 사이 실권을 장악해온 류사오치(劉少奇) 국가주석과 덩샤오핑(鄧小平) 총서기를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주자파(走資派)”로 몰아붙였다. 극좌 노선과 우파 노선이 정면충돌하면서 결국 류 주석은 감옥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71년엔 마오의 후계자로 내정됐던 린뱌오(林彪) 당 부주석이 반혁명음모가 탄로나자 도망치다 항공기 추락사하는 사건도 있었다. 마오와 함께 문혁을 주도한 장칭(江靑) 등 4인방(四人幇)은 76년 마오가 숨진 지 한 달 만에 발생한 군부 주도의 정변으로 몰락했다. 4인방을 축출하는 과정에서 마오의 후계자인 화궈펑(華國鋒) 당주석은 새로운 실력자 덩샤오핑과 협력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마오의 유훈에 따른 통치를 고집하는 바람에 변화를 가로막는 걸림돌이 됐기 때문이다.

 78년 12월 개혁·개방 노선을 천명한 덩샤오핑에 의해 화궈펑은 81년 당주석 자리에서 물러난다. 이를 계기로 중국공산당은 82년 12차 당대회에서 후야오방(胡耀邦) 체제가 들어서면서 우파가 주도하는 급진적 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보수파의 반발로 덩샤오핑은 87년 13차 당대회를 앞두고 후야오방을 총서기직에서 밀어냈다.

 이어 등장한 자오쯔양(趙紫陽) 체제도 오래가지 못했다. 자오 총서기가 경제개혁과 함께 정치개혁에 적극성을 보이면서 리펑(李鵬) 총리를 비롯한 보수파의 강한 반발에 직면했다. 물가폭등으로 민심이 이반되면서 89년 천안문(天安門) 민주화 운동이 터졌다. 사태 수습을 놓고 자오쯔양의 온건론과 리펑의 강경론이 맞대결했다. 결국 덩샤오핑이 리펑의 손을 들어주면서 자오는 총서기직에서 쫓겨났다. 이런 와중에 기술관료 출신의 장쩌민(江澤民) 상하이(上海) 당서기가 후계자로 발탁됐다.

 천안문 시위 유혈진압 이후 중국의 인권 탄압을 비판한 미국·유럽·일본 등이 중국에 강력한 제재를 가하면서 중국의 개혁·개방은 기로에 봉착했다. 돌파구를 모색하던 덩은 92년 남순강화(南巡講話) 카드로 개혁·개방의 가속화를 천명했다. 그해 가을 열린 14차 당 대회를 계기로 군부 기반이 취약했던 장쩌민은 ‘양자장(楊家將)’으로 불리며 영향력이 막강했던 군부의 보수파 양상쿤(楊尙昆)·양바이빙(楊白氷) 형제를 제거했다. 덩샤오핑의 총애를 과신한 천시퉁(陳希同) 베이징(北京)시 당서기가 장쩌민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려다 95년 숙청된 사건을 계기로 장쩌민의 지배력은 공고해졌다.

  2006년 ‘후진타오(胡錦濤)-원자바오(溫家寶) 체제’에 도전자가 나타났다. 당시 공산당 지도부는 2001년 말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이후 급성장에 따른 과열 억제 정책을 추진 중이었다. 성장지상주의자로 분류된 천량위(陳良宇) 상하이 당서기가 반기를 들었다. 천 서기는 원 총리 면전에서 책상을 내리치며 과열억제정책에 반발했다고 한다. 2007년 17차 당대회를 앞두고 터진 노선투쟁이었다. 결국 천은 2007년 7월 상하이 사회보장기금 비리 사건에 연루돼 실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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