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자연에 대한 두 개의 도그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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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이우근
법무법인 충정 대표

종교는 생명의 가치체계다. 그래서인지 어떤 종교인들은 생태계에 조금이라도 손을 대는 행위를 몽땅 죄악으로 간주한다. 도롱뇽의 생존권을 위해 초인적 단식투쟁을 벌인 스님도 있었고, 국책사업 현장마다 촛불 들고 찾아 다니며 반대시위를 하는 신부님·목사님도 있다. 나는 평신도석에 앉은 한 사람의 작은 신자에 불과하지만, 신앙은 성직자나 신학자만의 것이 아니라 신자들 각 사람의 것이라 믿기에, 감히 전문가들의 질책을 무릅쓰고 ‘종교와 자연환경’에 대해 주제넘은 고민을 해보려 한다.

 지난날 이 땅의 생태계는 경제개발의 구호 아래 치를 떨었고, 강과 시내의 맑은 물은 온갖 오염물질로 더럽혀졌다. 겨울이 되면, 도시의 나무들은 전기고문기 같은 장식전구를 잔뜩 매단 채 밤낮의 구별 없는 고단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생태계의 아픔과 탄식은 창조질서를 거스르는 인간의 죄성(罪性)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신앙의 눈이다(로마서 8).

 자연을 환경(環境)이라는 말로 부르는 것은 온당치 않다. 환경은 중심을 둘러싼 주변적 상황을 가리킨다. ‘인간이 중심, 자연은 주변’이라는 인식 자체에 반생명적 오만이 숨어 있다. 인간은 자연의 일원으로서 생태계에 참여할 따름이다.

 고통 속에 신음하는 뭇 생명들을 외면한 채 ‘이 세상에서는 물론 저 세상에서도 잘 살아야겠다’는 욕심 많은 사람들이 단지 헌금을 내고 신앙고백을 읊조린다는 이유만으로 슬쩍 얻어내는 ‘구원’이라는 것을 나는 차마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광야에 시내가 흐르고 황무지에 꽃이 피는(이사야 35) ‘새 하늘과 새 땅’이 성서의 종말론적 계시라면, 구원은 자연 속의 모든 숨결을 아우르는, 가없는 생명외경(生命畏敬)의 사랑이 아니겠는가.

 과거에 서구 기독교 열강들은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창세기 1장의 명령을 핑계로 식민지의 자연을 마구 유린했다. 그러나 이 명령은 무분별한 생태파괴의 면허가 아니다. 고대인들의 삶을 옥죄던 자연의 두려운 힘과 온갖 정령(精靈)들, 그 주술적(呪術的) 마력으로부터 인간 영혼을 해방시키는 자유의 선언이었다. 그 장엄한 생명의 외침을 개발지상주의의 슬로건으로 삼지 못한다.

 그렇다고 자연숭배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창세기 2장에 “에덴동산을 경작하고 지키라”는 구절이 있는데, 히브리어사전은 ‘경작하다(아바드)·지키다(샤마르)’의 의미를 ‘섬김과 보호, 돌봄과 보살핌’으로 풀이한다. 아바드·샤마르는 자연과 인간의 친화(親和)를 뜻하는 사랑의 언어일지언정, 인간을 자연 앞에 무릎 꿇리는 우상의 계명이 아니다. 창세기는 자연파괴와 자연숭배, 이 두 극단의 도그마를 동시에 깨뜨리는 양날의 칼이다.

 자연을 짓밟는 난개발이 정당화될 수 없다. 개발의 규모·방식·절차는 엄격히 통제돼야 한다. 이 점에서, 지나치게 서두른 감이 있는 4대강 사업은 졸속의 우려가 없지 않다. 상당한 보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물길을 추스르고 강바닥의 쓰레기 더미를 걷어내는 일은 정책적 판단의 문제이지 종교적 선악(善惡)의 문제는 아니다. ‘국토와 자원의 보호 및 균형 있는 개발과 이용’은 헌법(제120조)상의 국정지표이기도 하다.

 치산치수(治山治水)나 국가안보를 위한 일체의 국책사업을 신앙의 금기(禁忌)처럼 죄악시하는 환경근본주의는 왜곡된 자연숭배에 불과하다. 해군기지를 해적기지라고 조롱하는 성직자, 조국의 영해 주권보다 바윗덩어리를 더 아끼는 종교인들이 과연 신앙의 자리를 바르게 지키고 있는지 의문이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만약 신앙을 앞세운 정치투쟁이라면 그처럼 교활한 불신앙도 없을 것이다.

 땅에는 자동차가 달리고, 하늘엔 비행기가 날고, 강과 바다에는 배가 떠다니게 마련이다. 화석연료의 사용은 마땅히 절제해야 하지만, 그 때문에 찻길을 없애거나 공항과 항·포구를 폐쇄하지는 않는다. 고속열차가 끝도 없이 내달리는 천성산 골짜기마다 도롱뇽이 지천으로 꿈틀대고 있지 않은가.

 천안함의 비명, 탈북 동포들의 울부짖음에는 귀를 틀어막은 채 도롱뇽이나 구럼비 바위 앞에서만 치켜드는 편광(偏光)의 촛불은 제 온몸을 녹여 어두움을 두루 밝히는 촛불의 신성한 의미를 저버린 것이다. 종교인의 손에 들린 촛불은 모름지기 순수해야 한다.

 화해와 관용은 종교의 본분이다. 원효는 ‘둘로 나뉘지 않고 하나에 집착하지도 않는(無二而不守一)’ 심오한 화쟁(和諍)의 깨달음을 남겼다. 어제는 자연파괴의 개발신앙으로, 오늘은 자연숭배의 도그마로 긴 아픔을 겪어오는 우리의 산하(山河)에 종교계로부터 화쟁의 물길이 활짝 열리기를 기대한다.

이우근 법무법인 충정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