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남도 괴물로…특수분장 1세대 윤예령씨

중앙일보

입력

"정말 호러영화 분위기죠. "

한국영화계 특수분장의 1세대로 꼽히는 윤예령(35)씨가 작업실을 찾은 기자에게 툭 던지듯 말을 건넸다. 그의 말처럼 작업실은 귀신이 불쑥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출입구 바로 안쪽에 있는 배우 신현준의 마네킹. 영화〈은행나무 침대〉에 나온 것으로 온통 검정색 옷차림이 방문객을 섬뜩하게 한다.

뿐만 아니다. 괴물.요괴.동물.시체 등의 형상이 1, 2층을 가득 채우고 있다. 바깥 정원에도 각종 모형을 만드는 데 쓰인 석고틀이 잔뜩 쌓여있다. 사정을 모르고 들어온 밤손님이라면 이내 '나 살려라' 하고 줄행랑칠 만하다.

〈우담바라〉주연한 배우 출신

윤씨는 1988년 개봉한〈우담바라〉에서 주연을 맡았던 배우 출신. 〈구로 아리랑〉에도 옥소리와 함께 출연했다. 그래서인지 첫 대면이 낯설지 않았다. 배우에서 특수분장사로 인생의 방향을 튼 이유부터 궁금했다.

"80년대 말만 해도 여배우 대우가 그리 좋지 못했어요. 끝까지 배우로 남을 자신도 없었구요. 그래서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제가 잘 할 수 있고, 또 한국에서 필요로 하는 것을 찾다 보니 특수분장에 눈을 돌리게 됐습니다."

89년에 유학을 떠난 윤씨는 92년까지 악착 같이 공부했다. 로스앤젤레스 테크니컬 칼리지에서 밤낮 가리지 않고 배웠고, 학교를 마친 후에는 할리우드의 전문가를 일일이 찾아다니며 실무를 익혔다.

그래도 귀국 당시에는 할 일이 많지 않았다. 한국영화가 많은 특수분장이 필요할 정도로 성장하지 않았던 것. 놀이공원에서 보디 페이팅을 하거나, TV 프로.각종 이벤트에서 괴물.가면 등을 만들다가〈은행나무 침대〉(96년)를 계기로 특수분장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작업실 꽉 채운 괴물.시체

그동안 작업한 영화는〈쉬리〉〈퇴마록〉〈주유소 습격사건〉〈자귀모〉〈이재수의 난〉 〈코르셋〉〈닥터K〉등. 11일 개봉할〈단적비연수〉도 그의 손을 거쳤다. 최근 수십억원씩 투자하는 한국형 블록버스터가 속속 등장하면서 내년까지 일감이 밀린 상태다.

작업범위도 다양하다. 간단하게는 피가 흥건한 장면부터 복잡하게는 사람을 실제와 똑같이 만드는 것까지…. 〈단적비연수〉에 나오는 말(馬)머리에 털을 붙이는 데만 두 달이 걸렸다.

촬영 도중 잠시 숨겨둔 시체 모형을 낚시꾼이 진짜로 알고 신고해 경찰 60여명이 출동하는 소동도 있었다.

〈쉬리〉의 마지막 부분에서 진짜 이방희(김윤진)가 제주도 요양원의 벤치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국방부 특수부대측이 "그 이방희가 북한 8군단 이방희가 맞느냐" 며 변장술 강의를 요청했을 정도. 간혹 사고로 다리를 잃거나, 신체 일부가 기형인 일반인이 인체 부위를 만들어 달라고 주문하기도 한다.

"제가 영화를 찍던 때만 해도 물엿에 식용색소를 타서 피를 만드는 것을 보고 신기해 했는데…. 한국영화가 그만큼 컸다고 할까요. 그러나 이제 시작입니다. 할리우드에 비하면 아직 배울 게 너무 많아요. "

영화에서 컴퓨터 그래픽(CG)이 많이 활용되면서 특수분장의 영역이 줄어드는 것은 아닌지 물었다. "CG도 정교한 모형이 있어야 빛이 납니다. CG는 결국 원재료를 확대.복사하는 작업으로 볼 수 있거든요. "

10일부터 모형.의상 전시회

윤씨는 자신이 지금까지 작업한 일부 모형과 각종 영화에서 사용된 의상을 모아 10일부터 사흘 동안 문화일보홀에서 열리는 제1회 여성영화인축제에서 전시회를 연다.

"나중에 보면 유치하게 보이겠죠. 그래도 한국영화의 한순간을 기록한다는 마음으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한때 논문을 쓰려고 옛날 영화에 쓰였던 가발.상투 등을 찾았으나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었거든요. " 개인적으론 영화박물관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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