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의 얼굴] 조국에 첫 줄리메컵을, 보비 찰튼(3)

중앙일보

입력

‘뮌헨의 비극’으로 불리는 대형사고속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난 버스비 감독과 보비 찰튼은 그해 유럽 챔피언컵 결승 진출에 실패하고 팀 재건작업에 들어갔다. 그 결과 사고 발생 3개월 후에 영국 FA컵 결승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몇 달 후 찰튼은 잉글랜드 국가대표로서 첫 경기에 출전했다. 정치, 경제적으로는 한 국가지만 축구에 있어서 언제나 경쟁자인 스코틀랜드전이 찰튼의 데뷔 경기였다. 찰튼은 스코틀랜드에서 벌어진 원정 경기에서 톰 핀니의 어시스트를 받아 결승골을 뽑으면서 성공적으로 국제무대에 데뷔했다. 찰튼은 “아직도 볼이 골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골이 들어가는 순간 경기장은 쥐죽은듯이 조용해졌다”라며 지난 순간을 회상했다.

국가대표로서 첫 경기를 치른 찰튼은 4년 후 칠레에서 열린 제7회 월드컵에 참가했다. 예선 D조에 속한 잉글랜드는 첫 경기에서 헝가리에 패했지만 아르헨티나전에서 찰튼의 맹활약에 힘입어 3 - 1로 승리하고 8강에 진출했다. 하지만 8강전에서 브라질에게 패하며 고국으로 돌아왔다.

소속팀으로 돌아온 찰튼은 부활한 팀을 이끌고 맨체스터의 전성기를 열어나갔다. 찰튼은 팀을 62-63 시즌 FA컵 우승으로 이끈 것을 시작으로 63-64 시즌에는 프리미어 2위, 64-65, 66-67, 67-68 시즌에는 프리미어 리그 우승을 안겨줬다. 이 기간동안 맨체스터는 유럽에서 손꼽히는 명문클럽으로서 자리를 확고히했다.

팀 재건에 성공한 찰튼은 1966년 다시 국제무대로 돌아왔다. 잉글랜드에서 열린 8회 월드컵. 잉글랜드로서는 절대 놓칠 수 없는 우승의 기회였고 그 중심에 찰튼이 있었다. 국가대표팀에서 찰튼은 초기에 주로 왼쪽 윙백으로 출전했다. 한때 포워드로 뛰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뒤로 처진 센터포워드(deep lying center forward)
로 활약했다.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찰튼은 이 포진션이 무었을 하는 곳이라는 것을 전세계 팬들에게 알려줬다.

홈 팬들의 광적인 응원을 받은 잉글랜드는 조별 예선을 2승 1무로 여유있게 통과했고 8강에서 아르헨티나를 물리치면서 월드컵 출전사상 처음으로 준결승에 진출했다.

준결승에서 잉글랜드는 에우제비오가 이끄는 포루투갈과 맞붙었다. 찰튼이 이끄는 잉글랜드나 에우제비오가 이끄는 포르투갈 두 팀 모두 현재까지 역대 최강의 국가대표로 손꼽히는 팀이었다.

조별 예선과 8강전에서 거친 경기가 계속됐던 것과 달리 잉글랜드와 포르투갈의 준결승전은 페어 플레이의 정신을 보여준 신사적인 한 판이었다. 경기는 수비력에서 앞선 잉글랜드의 완승. 이대회 득점왕에 오른 에우제비오의 폭발적인 득점력도 보비 무어와 잭 찰턴이 이끄는 잉글랜드의 수비진을 뚫지 못했다.

공격에서는 찰튼이 맹활약했다. 찰튼은 전반 31분과 후반 34분 연속골을 성공시키며 잉글랜드의 승리를 이끌었다. 찰튼이 이 경기에서 터뜨린 두 골은 경기 후 오직 찰튼만이 할 수 있는 기술이라는 칭찬을 받을 정도로 훌륭한 골이었다. 반격에 나선 포르투갈은 후반 37분 에우제비오가 잭 찰턴의 핸드링으로 얻은 페널티킥을 성공시키며 한골을 만회했지만 경기를 뒤집지는 못했다.

결승전에 오른 잉글랜드 앞에는 숙명의 라이벌 서독이 버티고 있었다. 서독 역시 세계 최고의 리베로 베켄바우어가 이끄는 강팀. 1966년 7월 30일 오전 11시(현지시간)
웸블리 경기장에서 엘리자베스 여왕이 바라보는 가운데 결승전을 시작하는 휘슬이 울렸다. 결승전은 월드컵의 마지막 무대는 바로 이런 것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명승부였다.

베켄바우어는 보비 찰튼을 대인마크하라는 특명을 받고 경기에 임했다. 서독으로서도 보비 찰튼은 막지 못하면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 덕분인지 서독이 먼저 골을 넣었다. 전반 12분 서독의 할러가 문전 혼전중에 재빠르게 골을 뽑아낸 것이다.

하지만 선제골을 내준 잉글랜드는 위축되기보다는 긴장했던 몸이 풀리면서 6분 뒤에 허스트가 무어의 프리킥을 받아 동점골을 성공시켰다. 부슬비가 내리기 시작한 후반 잉글랜드는 추가골을 넣으며 처음으로 경기를 리드하기 시작했다. 피터스가 후반 32분 코너킥으로 올라온 볼은 논스톱 왼발 슛으로 서독 골문을 갈랐다.

잉글랜드는 남은 시간만 버티면 조국에 첫 줄리메컵을 안겨줄 수 있었지만 서독이 경기 종료 1분전 얻어낸 프리킥을 골로 연결시키며 승부는 연장으로 이어졌다.

연장은 찰튼을 위한 무대였다. 찰튼의 왼발에서 시작하는 절묘한 패스에 상승세를 탄 잉글랜드는 연장 전반 10분 허스트의 슛이 상단 크로스바를 맞고 수직으로 떨어지면서 추가골을 뽑아냈다. 서독의 베버가 뛰어나온 공을 걷어냈지만 선심은 잉글랜드의 골을 인정했다. 아직까지 골인 여부를 놓고 말이 많은 이 장면은 1985년 오심으로 판정났지만 경기 결과를 뒤집을 수는 없었다.

허스트는 이 골에 대한 잡음을 없애려는 듯 경기 종료 직전 자신의 세 번째 골을 성공시키며 결승전 사상 첫 해트트릭을 기록했다. 결국 잉글랜드가 4-2로 승리하며 조국에 첫 줄리메컵을 안겨줬다.

결승전은 허스트가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맹활약했지만 찰튼이 더 많은 찬사를 받았다. 그는 뒤로 처진 스트라이커며 게임메이커로서 공격수들을 완벽하게 지원하며 축구 선수의 새로운 장을 개척했다.

조국에 첫 월드컵 우승을 안긴 찰튼은 58년부터 70년까지 국가대표선수로 활약하며 국제경기에 106회 출전해 모두 49골을 뽑아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업적에 대한 보답으로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하지만 찰튼에게는 그 어떤 훈장이나 우승컵보다 자신을 ‘미스터 잉글랜드’라고 부르는 잉글랜드 축구 팬들이 소중하다. 보이지 않는 이 훈장은 그가 영원히 잉글랜드 축구의 우상으로 존재할 수 있는 힘이다.

Joins 금현창 기자<lafirst@joins.com>

◆ 월드컵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조인스스포츠에서
(http://sports.joins.com/worldcup/)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