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박은정 검사, 사표 대신 진실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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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호 02면

2004년 김모씨는 자신의 블로그에 “친일파 나경원은 판사 시절, 땅을 찾겠다는 이완용 후손들에게 승소판결을 했다”는 글을 올렸다. 당시 한나라당 의원이던 나경원씨는 블로거 김씨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사건은 서부지검 박은정 검사에게 배당됐다. 그러나 박 검사가 출산휴가를 떠나는 바람에 최영운 검사에게 넘어갔다.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김씨는 대법원에서 700만원의 벌금형을 받았다. 나씨가 판사 시절 그런 소송을 맡은 사실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아니면 말고’식 의혹 제기에 불과했던 이 사건은 지난해 나씨가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나오면서 다시 불거졌다. 인터넷 팟캐스트 ‘나꼼수’의 패널인 주진우 시사인 기자는 “나 후보의 남편인 김재호 판사가 검사에게 기소를 청탁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당시 나 후보는 주 기자를 선거법 위반 혐의로 경찰에 고발했다.

그냥 끝날 것 같던 사건은 지난달 28일 나꼼수가 “박은정 검사가 공안수사팀에 김재호 판사로부터 블로거 김씨를 기소해 달라고 청탁받은 사실을 말했다”며 검사의 이름까지 거명하면서부터 폭발했다. 만일 현직 판사가 자신의 부인이 관련된 사건을 놓고 검사에게 피고인을 기소해 달라고 부탁했다면 단순하게 볼 사안이 아니 다.

법원에서 700만원이나 되는 벌금형을 받은 점으로 미뤄 블로거 김씨의 잘못은 분명하고 그냥 놔둬도 기소됐을 것이다. 또 나꼼수가 잇따라 나씨를 공격하는 정치적 배경도 짐작할 만하다. 그러나 명예훼손이나 정략적 냄새가 나는 주장과는 별개로 우리는 현직 판사의 직업 윤리를 따져보지 않을 수 없다. 만일 검사에게 기소를 부탁하는 전화를 했다면 김재호 판사는 마땅히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져야 한다. 이에 대해 나씨는 1일 기자회견을 열어 “남편은 기소를 청탁한 사실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검사와 전화 통화를 했는지는 확인해주지 않았다.

이제 공은 박은정 검사에게 넘어가 있다. 박 검사가 밝히면 진상은 금방 규명된다. 하지만 박 검사는 진실을 말하는 대신 사표를 냈다. 검찰 수뇌부가 이를 반려하자 이번엔 휴가를 핑계로 잠적했다. 그러다 보니 온갖 소문이 난무하고 있다. 크게 실망스러운 일이다. 죄를 처벌하고 정의를 구현하는 게 검사의 존재 이유다. 그런 검사가 온 국민적 관심이 몰려있고, 자신이 진실을 밝힐 수 있는 사안에 대해 이토록 무책임하게 처신한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김 판사로부터 기소를 부탁 받은 건지, 아니면 김 판사의 전화를 자신이 그렇게 해석했다는 것인지, 그도 아니면 자신이 과장해서 말한 것인지 박 검사는 진실을 밝혀야 한다. 비겁한 침묵은 다른 검사들까지 욕보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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