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ulture] 강남 학생 47명 ‘배려의 하모니’ 연주 … 미래의 사회 지도자 많이 나올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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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실이 생겼다는 기쁨도 잠시. 매번 “시끄럽다”는 이유로 연습실에서 쫓겨났다. 초등학교 강당부터 건설회사 지하실, 교회, 음악학원, 어린이집, 아파트 관리사무소까지 ‘서울유스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연습장소를 찾아 이곳 저곳을 떠돌았다. 중3이나 고3이 된 단원을 둔 엄마는 학업에 열중해야 할 때가 아닌가 고민하기도 했다. 그러나 단원들·지휘자와 부모 모두 오케스트라를 포기할 수 없었다. “연주회 무대에 오르면 갈증이 해소돼요.” ”함께 연주하며 배려심을 배우니 아이들 인성교육에 좋습니다.” “아이들이 청소년기에 쌓은 추억을 지켜주고 싶어요.” 그렇게 보낸 시간이 어느덧 11년. 2002년 서울 강남지역에 사는 초등학생 서른 명 남짓으로 시작했던 오케스트라 가족이 지금 47명으로 늘어났다. 초등학생이었던 단원들은 대학생이 돼 신입 단원들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3일 서울 여의도동에 있는 영산아트홀에서 열리는 창단 10주년 기념 정기연주회를 준비하고 있는 단원들을 만났다.

송정 기자
사진=황정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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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단 10주년 정기공연 여는 서울유스오케스트라


“우리 동네 사람들의 소소한 이야기를 실어준다던데, 맞나요?”

‘강남 서초 송파&’ 창간 소식이 알려진 지난달 14일, 기자는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전화 속 목소리에는 기대와 설렘이 담겨 있었다. 전화를 건 사람은 서울유스오케스트라의 총무를 맡고 있는 김휴정(40·반포동)씨. 그는 “못난 고슴도치 엄마들의 자녀 사랑으로 보일 수 있지만 열 번째 정기연주회를 준비하고 있는 우리 아이들의 이야기를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나흘 뒤 18일 오후 6시, 정기연주회를 보름 앞두고 막바지 연습에 한창인 단원들을 만나러 갔다. 연습실은 오케스트라와는 거리가 먼 강남구 논현동에 있는 한 미용학원이었다. 미용학원 측이 쉬는 토요일에 연습실로 쓸 수 있도록 해준 것이다. 덕분에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매주 토요일 오후 6시부터 3시간 동안 이곳에서 연습한다. 단원들은 퍼스트 바이올린, 세컨드 바이올린, 첼로·콘트라베이스, 오보에·플릇, 클라리넷 등 5개 파트로 나뉘어 연습하고 있었다.

연주 실력도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2002년 창단 때부터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있는 지휘자 이인호(59)씨는 “음악을 전공하는 아이는 3명밖에 안 되지만 모든 단원의 실력은 전공자 못지 않다”고 말했다.

이들의 연주 실력이 오케스트라에 들어올 때부터 뛰어났던 것은 아니다. 창단 1년 뒤 연 첫 정기연주회는 학교 학예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관객도 학부모들 뿐이었다. 하지만 단원들은 빠르게 성장했다. 이씨는 “처음 연주회를 보며 ’이걸 내가 해야 하나’ 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1년 정도 지나면서 아이들의 실력이 늘어 빛이 보였다”고 회상했다. 4년쯤 지나자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편곡한 악보가 필요 없었다. 성인용 악보를 보고 척척 연주했기 때문이다. 연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활동하고 있는 최서윤(숙명여대1)양은 “지휘자 선생님이 어려운 곡을 선정해 주면 처음에는 당황스러워요. 그러나 쉼 없이 연습하다 보면 저도 모르는 새 실력이 향상됐음을 느낀다”고 말했다.

1년간 꼬박 연습한 뒤 여는 정기연주회는 단원들에겐 어디서도 할 수 없는 값진 경험이다. 올해로 6년째 오케스트라에서 활동하고 있는 최소은(진선여고2)양은 “무대에 서서 핀 조명을 받는 것,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 박수를 쳐 주는 것 모두 감동”이라고 말했다. 이런 단원들의 모습이 부모에겐 감동적인 선물이다. 김씨는 “공연을 마친 아이들의 얼굴은 연주에 취한 듯 상기돼 있다”며 “오케스트라 활동이 아니라면 아이들이 어디서 이런 경험을 할 수 있겠느냐”고 되물었다.

창단 때부터 지휘를 맡아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있는 이인호(가운데)씨와 단원들. 이씨는 “단원들의 실력이 전공자 못지 않다”고 자랑했다.

연습실 찾아 전전 … 미술학원 배려에 감사

단원들은 연주 실력을 키우는 동시에 올바른 인성을 길러나갔다. 지휘자 이씨는 “단원들 중에서 20~30년 뒤 사회 지도층 인사가 많이 나올 것 같다”고 말했다. “요즘 아이들은 공부만 하느라 감성이 부족하고 다른 사람과 어울리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우리 단원들은 함께 연주하면서 서로 배려하는 자세를 배우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단원들은 순수한 시골 아이들 같다”는 이씨의 말에 단원도 학부모도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단원들이 오케스트라 활동을 한 기간은 평균 5년. 따라서 상당수 단원은 오케스트라에서 함께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러다 보니 단원들끼리 유대감은 단단하다. 정유나(이화외고1)양은 “초등학교 때부터 함께 연습한 덕분에 가족 같은 분위기인 데다 서로 호흡을 맞춰 연주해야 하다 보니 학교 친구들보다 더 친근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서하(대도초6)양은 “집에서 맏이인데 오케스트라에 오면 언니들을 만날 수 있어 좋다”고 했다.

다른 단원이 연주하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자기의 악기 소리를 낮추는 아이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혼자 돋보이는 것보다 함께하는 것을 택한다. 대학에서 첼로를 전공하고 있는 임재린(서울대2)양은 “가끔 공부 시간도 부족해 오케스트라 연습이 부담스러울 때도 있지만 동생들이 열심히 연습하는 모습을 보고 오히려 배우는 게 많다”고 말했다.

오케스트라가 걸어온 길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연습실을 빌리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아파트 관리사무소 한 켠의 회의실부터 음악학원, 어린이집, 초등학교 강당까지. 자리를 내주는 곳이 있으면 어디든 달려갔다. 과천까지 오갈 때도 있었다. 이런 어려움을 겪었기에 함께 연습할 수 있는 공간을 내준 미용학원 측이 고마울 따름이다. 아이들 공부에 방해되는 것은 아닌지가 많은 엄마의 고민거리였다. 특히 중3과 고3처럼 어느 때보다 학업에 열중해야 할 시기엔 엄마들의 고민은 더욱 커진다. 토요일 오후 3시간은 강남 학원가에서도 유명한 강의가 열리는 이른바 황금시간대이기 때문이다. 이 시간을 오케스트라에 오롯이 내줘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엄마·아이 대부분은 오케스트라를 택했다. 그 이유를 묻자 “학창 시절 학교와 학원을 오간 기억밖에 없다면 얼마나 슬프겠냐”며 “오케스트라는 마음의 고향이자 청소년기에 중요한 부분”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들은 열 번째 정기연주회 무대에서 또 하나의 추억을 만들기 위해 땀 흘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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