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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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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이우근
법무법인 충정 대표

해마다 2월이 되면 일본 후쿠오카의 한 공원에서는 싸늘한 겨울바람을 가르며 정갈한 시어(詩語)가 흐르곤 한다. 1945년 2월 16일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獄死)한 윤동주 시인을 추모하는 일본인들이 우리말로 읊는 시 낭송의 목소리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서시)

 첫 시의 첫 구절을 ‘죽는 날’로 시작한 스물네 살의 시인을 나는 달리 알지 못한다. 일제(日帝)의 사슬에 얽매인 민족수난기, 윤 시인의 고향 북간도의 동포들은 일황력(日皇曆) 대신 단군기력(檀君紀曆)을 벽에 걸어두고 은밀히 광복의 소망을 키워가던 사람들이었다. 그 속에서 치열한 성찰과 저항의 시어들로 솟아난 윤동주의 시혼(詩魂)은 아이로니컬하게도 문학사(文學史)의 암흑기에 결실한 값진 수확이었다.

 식민지의 지식청년에게 저항정신은 운명처럼 거스를 수 없는 실존의 굴레였을 터…, 그는 사랑과 괴로움, 넘치는 슬픔에까지도 거짓말처럼 저항했다. “바람이 부는데/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다…./ 단 한 여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 시대를 슬퍼한 일도 없다.”(바람이 불어)

 그 악몽의 시대를 어찌 슬퍼하지 않았으랴! 사랑을 고백할 단 한 명의 여인도, 영혼의 각혈(<54AF>血)을 토해낼 단 한 뼘의 자리도 갖지 못했던 시인은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들을 사랑”하다가 일제의 감옥에서 정체 모를 생체실험용 주사를 맞고 스물여덟 해의 짧은 삶을 거둔다.

 하이데거였던가, “진리를 세우는 또 하나의 길은 본질적 희생이다”라고 말한 것은…. 일제의 폭력은 자유와 평화, 사랑과 희망, 그 모든 생명가치를 짓밟는 진리의 적(敵)이나 다름없었기에, 윤동주의 순국(殉國)은 진리를 위한 본질적 희생이었음에 틀림없다. 그의 민족혼은 독립투사의 심장처럼 뜨거웠고, 그의 저항은 의열단(義烈團)의 전투처럼 처절했으며, 그의 성찰은 철학자의 명상보다 진지했고, 모든 죽어 가는 것들을 향한 시인의 사랑은 종교인의 신앙보다 거룩했다.

 제국주의만이 폭력의 체제는 아니다. 소통 없는 정치권력, 부도덕한 돈의 위력, 아니 사회적·문화적·종교적 권위들마저도 독선과 도그마의 칼을 휘두르는 한 본질상 폭력일 수밖에 없다. 약자와 소외계층의 눈물로 탐욕의 허기를 채우는 시장권력, 나라의 미래인 청소년교육을 정치투쟁의 제물로 삼는 자치권력, 신흥종교의 부흥회처럼 들뜨고 헤픈 집단감성의 충동으로 분별력을 마비시키는 포퓰리즘의 촛불권력, 삶의 다양한 가치를 폐쇄적 신조(信條) 속에 옭아매는 종교권력 따위들은 시인이 온몸으로 저항해 마지않았던 제국주의적 폭력에서 멀지 않다.

 꿈에도 못내 그리던 독립의 날을 불과 여섯 달 앞두고 애통하게 숨을 거둔 윤 시인은 가슴 벅찬 광복 67년의 역사를 분열과 상쟁으로 더럽혀온 이 땅을 굽어보며 또 어떤 성찰에 잠겨 있을까? 굶주린 인민들이 절대권력의 우상 앞에 대대로 머리를 조아리는 북녘땅을, 양극화와 좌우의 갈등으로 내일의 꿈을 잃어버린 남녘땅을, ‘열린 보수’와 ‘따뜻한 진보’를 알지 못하는 외눈박이 광신도들의 싸움터가 된 이 나라를, ‘핵 없는 세상’을 소리 높이 외치면서 ‘핵 있는 북한’에는 입도 벙긋 않는 껍데기 이념을, 절체절명의 탈북동포들을 3대 멸족의 사지(死地)로 내모는 중국의 살인적 만행에도 좀처럼 분노할 줄 모르는 뼛속 깊은 중화(中華)사대주의를.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참회록) 시인의 탄식은 그대로 우리의 서러운 고백이다. 도덕적으로 완벽하다는 정권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비리와 부패의 악취, 막중한 국가정책 앞에서도 어제의 말이 오늘과 다르고 오늘의 말도 내일 또 어떻게 뒤집을지 알 수 없는 야바위 정치판, 수십 년 찌든 돈봉투 선거에 짐짓 놀란 체 호들갑을 떠는 위선의 몸짓, 젊은 세대의 좌절과 울분을 들쑤셔 정파적 이익을 낚아채는 선동의 바람몰이, 수인(囚人)의 성욕감퇴에 여성의 생물학적 완성도를 공개 처방하는 진보적(?) 관능 사회… 이 역겨운 현실이 정녕 윤 시인의 희생에 값하는 조국의 모습인가?

 이달로 67주기(週忌)를 맞는 윤동주의 슬픈 넋은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지금껏 괴로워하고 있지 않을까? 갈가리 찢긴 민족공동체, 거짓투성이의 사회상(社會相), 그 욕된 우리네의 삶을.

이우근 법무법인 충정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