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만원대 안구 마우스, 5만원에 만들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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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23일 서울 서초동 삼성전자 서초사옥 브리핑실에서 이 회사 직원들이 장애인용 안구마우스 ‘아이 캔’을 시연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이 회사 창의개발연구소의 1호 과제로 선정된 제품이다. [연합뉴스]

삼성전자 조성구(37) 책임연구원은 지난해 초 슬럼프를 겪었다. ‘반도체 엔지니어로 일한 9년 동안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데는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계기는 TED 동영상이었다. TED는 가치 있는 아이디어를 널리 알리고 공유하자는 취지의 글로벌 강연회다. 여기에서 한 미국인 발표자가 루게릭병에 걸린 친구를 위해 눈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도구를 선보였다. 이 제품이 눈동자의 움직임을 인식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아이 라이터(eye Writer)’였다.

 조 연구원도 자신의 재능을 활용해 다른 이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다. 사내 게시판에 글을 올렸더니 네 명이 동참의 뜻을 밝혔다. 그렇게 지난해 5월, 다섯 명이 의기투합했다. 그림 그리기에서 한발 나아가, 전신마비로 눈동자만 움직일 수 있는 사람도 자유롭게 컴퓨터를 쓸 수 있도록 하는 ‘안구 마우스’ 개발을 목표로 정했다. 주로 일과 후 또는 주말에 머리를 맞댔다. 고단하기보다는 즐거웠지만 개인적 시간에 짬을 내서 하는 일이라서 진행은 더뎠다. 하지만 기회가 왔다. 때마침 삼성전자가 창의개발연구소를 만들기로 한 것. 아이디어를 제안해 과제로 선정되면 기존 업무에서 벗어나 아이디어를 구체화하기 위한 태스크포스(TF)활동을 최대 1년까지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제도다. 사업화를 목표로 하지 않기 때문에 실패도 용인한다. 언제까지 개발할지도 참가자들끼리 논의해 결정한다. 안구 마우스가 1호 과제로 선정됐고, 개발팀은 각자 하던 업무에서 한시적으로 벗어나 제품 개발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그 성과물인 전신마비 장애인을 위한 보급형 안구 마우스인 ‘아이 캔(eye Can)’을 삼성전자가 23일 공개했다. 이미 시중에는 안구 마우스가 있다. 문제는 가격이다. 유경화(33)씨는 “시장 조사를 해보니 1000만원이 훌쩍 넘는 가격 때문에 웬만한 가정에선 사서 쓸 엄두를 내지 못했다”고 말했다. 아이 캔은 안경과 웹캠 등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활용하기 때문에 5만원 이내의 재료비로 제작이 가능하다. 안경과 웹캠은 ‘아이 라이터’ 아이디어를 그대로 활용했다. 필요한 사람은 누구나 만들어 쓸 수 있도록 안경 제작 매뉴얼과 소프트웨어를 공개했다. 일반 마우스보다 더 쉬운 기능도 넣었다. 시선을 위로 하면 화면이 위로 올라가고 옆을 보면 화면이 그 방향으로 돌아간다.

 제품 개발 막바지에 ‘연세대 스티븐 호킹’으로 불리는 신형진(29)씨와 연이 닿았다. 10년째 안구 마우스를 쓰고 있는 신씨는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며 제품 개발을 도왔다. 몇 시간 동안 게임을 해 본 뒤 신씨는 “내가 쓰는 안구마우스 기능의 80%는 충분히 한다”면서 “생각보다 쓰기 편해서 놀랍다”는 피드백을 줬다. 수원에 사는 한 환자는 아이 캔을 처음 써본 날 안구 마우스를 굴려 화면에 ‘사랑’과 ‘감사’라는 두 단어를 썼다. 조 연구원은 “아이 캔은 세상에 없던 기술이 아니라 앞선 사람들의 아이디어를 발전시킨 것”이라며 “우리의 아이디어도 더 자라서 눈을 이용한 기술, 장애인을 위한 정보기술(IT)이 발전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삼성전자는 보건복지부 산하 한국장애인개발원과 아이 캔의 국내 보급 방안을 협의 중이다. 해외 법인을 통해 보급하는 것도 검토하고 있다. 국내 루게릭병 환자는 1700명, 근육병 환자를 통틀어 3만 명이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안구 마우스

카메라와 적외선 센서 등을 모니터에 달아 PC 사용자의 눈동자 움직임대로 커서가 이동하도록 만든 마우스. 하지만 아이 캔은 일반 안경에 웹캠을 달아 만든 하드웨어와 눈동자의 움직임을 인식하는 소프트웨어로 구성된다. 눈을 깜빡이는 동작을 마우스의 ‘클릭’으로 인식하는 원리는 일반적인 안구마우스와 같다. PC에 소프트웨어를 깔면 화면에 마우스 모양 아이콘이 여럿 뜬다. 왼쪽 클릭 아이콘에 눈동자를 고정시키고 한 번 감았다 뜨면 마우스 왼쪽 클릭을 한 것과 같다. 이런 식으로 더블클릭, 화면 스크롤, 드래그 등 일반적인 마우스의 기능을 모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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