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취향 강요에 반항…사춘기 땐 보라색으로 머리 염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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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세계적인 패션 모델이라면? 세계 패션계를 쥐락펴락하는 잡지 편집장이라면?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처럼 이 집 아이들은 출간도 안 된 ‘해리포터’ 원고를 엄마 덕에 먼저 읽을 수 있을까. 또 항상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어느 한 구석 빈틈없이 완벽하게 차려입고 학교에 다닐까. 2001년부터 10년 동안 패션 잡지 ‘보그’의 프랑스판 편집장을 지낸 카린 로이펠트(58)의 딸 줄리아 로이펠트(32)를 만나 그 답을 들어봤다. 카린은 영화 ‘악마는 …’에서 세계 패션계의 절대 권력자인 미란다 편집장의 유일한 경쟁자로 그려졌던 인물이다. ‘보그’ 편집장이 되기 전 패션 모델로도 활동했고, 1990년대엔 이탈리아 브랜드 구찌의 수석 디자이너 톰 포드에게 ‘뮤즈(영감을 주는 사람)’ 역할을 했다. 그의 딸 줄리아는 “엄마가 특별하대서 특별한 유년 시절을 보내진 않았다”고 말했지만 그 말이 곧이곧대로 들리진 않았다. 그는 엄마 카린이 ‘보그’ 편집장이었던 시절 패션 디자이너 톰 포드의 첫 번째 여성용 향수 광고모델로 기용됐다. 또 최근에는 프랑스의 고가 화장품 브랜드 랑콤의 모델로 활약하기도 했다. 그를 만난 곳은 여성복 브랜드 ‘하니 와이’의 광고 촬영 현장. ‘하니 와이’는 SK네트웍스가 만드는 여성복 브랜드로 지난해부터 줄리아를 모델로 쓰고 있다. 그는 ‘패셔니스타의 딸’로 자라 ‘뉴욕의 패셔니스타’로 사는 이야기를 풀어놨다. 그러면서 인터뷰 중간중간 “엄마 이야기 말고 내 이야기를 더 하고 싶다”고 말했다. 서른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누구의 딸’이란 꼬리표가 붙는 게 정말로 싫은 듯했다.

뉴욕=강승민 기자

줄리아 로이펠트는 ‘로이펠트가 되고 싶어’란 이름의 패션 블로그가 만들어질 만큼 패션계에서 화제가 되는 인물이다. 그는 “원피스나 투피스같은 여성적인 옷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엄만 ‘수퍼 맘’이었나 봐요. 바쁜 와중에도 늘 나와 남동생을 데리러 학교에 왔고, 매주 일요일 새벽엔 승마 수업에 데려가 주셨죠. 늘 휴가도 함께 간 걸요. 물론 엄마가 너무 바빠 동생과 주로 놀긴 했지만.”

 줄리아는 “유명한 엄마 때문에 스트레스는 없었냐”는 질문에 작정한 듯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특별한 엄마에겐 특별한 그늘이 있는 게 당연했다.

 “엄마는 날 바비 인형으로 여겼던 것 같아요. 열살 땐가, 표범무늬 셔츠랑 가죽 반바지를 입었던 기억이 나요. 결코 평범하지 않은 차림새였죠. 동생은 거기에 베레모까지 쓰고 다녔어요. 모두 엄마가 하나하나 골라 입혀준 것이에요. 사진을 찍을 때도 웃지 말라고 하셨어요. 잡지 화보처럼 멋진 표정을 지어야 한다면서. 학교 친구들은 다들 활짝 웃으며 사진을 찍는데…. 학교에서 선생님이 무슨 일 있느냐고 물어본 적도 있었다니까요.”

 무심한 듯 유년 시절을 들려주는 그에게서 너무 일찍부터 전문가적 취향에 길들여진 데 대한 약간의 반항심이 느껴졌다.

 “열네 살 때쯤엔 일부러 엄마 뜻을 거스르기도 했어요. 엄마가 싫어하는 보라색으로 머리를 염색하고, 큼지막한 보라색 군화 같은 것도 신었죠. 옷은 너덜너덜 지저분해 보이는 ‘그런지 스타일’로 입고. 엄만 우아하고 고전적이면서 여성스러운 스타일을 좋아하는데 말이죠.”

 그는 “열여덟이 되기 전까진 엄마랑 패션쇼에 같이 가는 것도 싫었다”고 했다. 늘 패션쇼에 딸을 데리고 갔던 엄마. 하지만 딸은 엄마 무릎에서 졸기 일쑤였다고 했다. “그땐 다들 반항하는 나이였으니까요.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엄마가 멋있어 보이더라고요. 요즘 내게 가장 큰 영감을 주는 건 엄마예요.”

광고 촬영에 들어가기 전 포즈를 취한 줄리아는 “아침 일찍인데도 화장이 잘 돼서 예쁘게 나올 것”이라며 웃었다. [하니와이 제공]

 그가 패션에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 된 건 “대학교에 입학한 뒤”라고 했다. 그제야 엄마의 옷방에 드나들기 시작했단다. 유전자에 새겨진 본성 때문일까. 그는 “자연스럽게 패션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중·고생 땐 패션이랑 아무 상관 없는 일을 꿈꿨어요. 아프리카 케냐 같은 데서 야생동물 관리원(ranger)으로 몇 년쯤 일하고 싶었죠. 인테리어 디자인도 하고 싶었고요. 인테리어 공부도 해봤는데 나랑 안 맞더라고요. 그래서 패션학교 파슨스에 갔죠.”

 한때 엄마의 취향을 거부했던 소녀는 이제 “내 아이도 나와 비슷한 경험을 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예비 엄마가 돼 있다. 현재 임신 4개월. 남자친구인 패션 모델 로버트 콘지크와 결혼은 하지 않은 채 아이를 가졌다. 이 역시 ‘그 엄마에 그 딸’다운 삶의 방식이다. 카린도 파트너인 크리스티앙 레스토앙과 결혼은 하지 않고 줄리아를 낳았다. 레스토앙은 패션 브랜드 ‘이큅먼트’를 운영하다 카린이 편집장이 되자 구설을 우려해 사업에서 손을 떼기도 했다.

 “네 살 때, 이탈리아 아동용 패션잡지 ‘보그 밤비니’에 모델로 나갔어요. 엄마가 스타일링을 해줬고 스타 사진작가 마리오 테스티노가 사진을 찍었죠. 다른 애들은 못 해본 일이었죠. 아주 훌륭하고 재미있는 경험이었어요. 나도 우리 엄마처럼 내 아이에게 특별한 경험을 시켜주는 엄마가 되고 싶어요.”

 패션 관련 유명 블로그 중엔 ‘로이펠트가 되고 싶어(iwanttobearoitfeld.com)’란 사이트가 있다. 그와 엄마인 카린, 남동생 블라디미르의 온갖 활동 상황을 전하는 곳이다. 요즘은 셋 중에서 줄리아의 비중이 가장 크다. 줄리아의 스타일, 옷과 액세서리 등이 거의 실시간으로 소개된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패션계의 주요 관심사로 떠오른 것이다. 이제 엄마만큼 유명세를 치르고 있는 패셔니스타 줄리아에게 ‘멋진 여자 되는 법’을 물었다.

 “청바지에 티셔츠만 걸쳐도 멋지면 좋겠지만, 난 아녜요. 그래서 한껏 여성스럽게 꾸미는 게 좋아요. 한 가지 조언이라면 명품 브랜드로 한 벌을 입는 건 정말 별로예요. 대신 낡은 듯한 ‘빈티지’ 의상과 스트리트 패션, 디자이너가 공들여 만든 명품 옷을 적절히 섞어 입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제일 중요한 건 어떤 옷을 입든 스스로가 기분이 좋아야 한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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