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이헌재 위기를 쏘다 (44) 부실기업, 시장이 알아서 감시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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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1998년 이헌재 당시 금융감독위원장은 재벌 개혁을 ‘야생마 길들이기’에 비유했다. 야생마를 통제하듯이 재벌 개혁도 점진적으로 시스템을 통해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가 주장한 부채비율 200%는 재벌의 마구잡이식 확장 경영을 발목 잡는 족쇄가 된다. [일러스트=박용석 기자]

화끈한 개혁과 뜨뜻미지근한 개혁.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나는 후자다. 심각한 위기 상황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중 도둑처럼 찾아오는 개혁이 있다. 개혁 대상도 개혁이 진행되는지를 모른다. 한참 지나고 보니 뭔가 바뀌어 있다. 그런 개혁이 진짜다.

 대표적인 게 회계 제도와 공시 제도다. 처음엔 다들 ‘선진 제도려니’ 하고 받아들였다. 3년간 유예 기간이 있어 더 그랬을 것이다. 이 두 제도로 기업 문화는 완전히 바뀌었다. 내부 정보 이용, 횡령, 배임, 주가 조작, 공시 위반. 이 모든 것이 불가능해졌다. 이 제도에 걸려 구속된 재벌 총수도 여럿이다.

 이런 개혁은 위정자 입장에서도 편하다. 일단 저항이 없다. 한번 장치만 만들면 일일이 감시할 필요도 없다. 시장이 스스로, 알아서 감시한다.

 부채비율 200%도 비슷하다. 98년 4월, 금융감독위원장으로 취임하며 던진 기업 구조조정의 가이드라인이었다. “내년 말까지 부채비율이 200%를 넘는 기업은 도태될 겁니다.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입니다.” 나는 재벌 개혁을 두고 ‘야생마 길들이기’라고 비유한 적이 있다. 야생마를 길들이겠다고 처음부터 올라타면 다친다. 울타리를 쳐놓고 조금씩 좁혀가며 행동을 통제해야 한다. 부채비율 200%는 재벌을 옭아매는 담 중 하나였다.

 200%. 사실 정교한 계산을 통해 나온 기준은 아니었다. 해외 기업들의 평균 부채비율을 검토해 정했다. 당시 미국 기업들의 부채비율은 100%가 채 되지 않았다. 일본이 150~200% 사이였다. 200%. 지금은 대수롭지 않게 들린다. 이미 시장의 법칙이 돼서 그렇다. 지금 부채비율이 300%쯤 되는 기업이 있다 치자. 모두 ‘불량 기업’이라고 인식한다. 주가가 떨어지고 추가 대출이 막힌다. 이것이 시장의 감시다.

 그땐 아니었다. 30대 그룹의 평균 부채비율이 518%였다. 1000%를 넘나드는 회사도 있었다. 그걸 확 끌어내리라니 자연히 반발이 심했다. 대기업들이 대놓고 “우린 못 한다”고 나왔다. 4, 5년 말미를 주면 몰라도 2년 안에는 절대 200%를 못 맞추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나에게 직접 말하진 못했다. 금감위의 서슬이 시퍼렇던 때다. 나는 아예 기업인들은 만나질 않았다. 그러니 은행에 호소했다. 금감위가 각 그룹에 “5월 초까지 주거래 은행에 제출하라”고 지시한 재무약정자료. 15대 그룹은 일제히 “부채비율 200%는 못 맞추겠다”는 자료를 냈다. 어떤 그룹은 “건설·중장비 회사 특성상” 또 다른 그룹은 “막 인수한 회사 때문에” 어렵다고 했다. “도저히 실현 불가능한 계획”이라며 정부를 비판하는 언론플레이도 잇따랐다.

 나는 눈도 꿈쩍하지 않았다. “부채 비율이 높은 계열사를 팔거나, (그 회사를 살리고 싶으면) 다른 계열사를 팔면 됩니다.” 나는 공개 석상에서 재벌을 압박했다. 왜 위기가 왔는가. 원칙도 두려움도 없이 성장만 쳐다보고 달려서다. 이제 그 원칙을 세우겠다는 것이다. 이규성 재정경제부 장관과 강봉균 청와대 경제수석이 지원 사격에 나섰다. 이 장관은 “실속있는 기업 몇 개를 팔아서라도 부채비율을 맞추라”고 기업을 다그쳤다. 강 수석은 “계열사별 비율은 조정하더라도 그룹 전체가 200%를 달성해야 한다는 것은 타협할 수 없는 원칙”이라고 맞장구를 쳤다.

 1년쯤 지나자 반발이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정부가 물러서지 않을 것이라는 걸 기업들이 깨닫게 된 것이다. 99년 가을, 나는 다시 한번 독촉에 나섰다. 9월 한 강연에서 “200%를 못맞춘 기업은 대출이 어려워질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10월엔 “200%를 달성한 기업이면 (당시 워크아웃에 들어간) 대우 계열사 인수도 가능하다”고 당근을 제시했다.

 1년 7개월간의 꾸준한 독려. 효과는 있었다. 금감위는 99년 12월 21일, 청와대에 “연말까지 부채비율 200%를 달성하겠다고 약속한 33개 그룹 중 32개 그룹이 목표치를 맞출 것으로 보인다”고 보고한다. 98년 초 518%에 달하던 부채비율은 2년 사이에 절반 이하로 뚝 떨어졌다. 기업들이 팔 건 팔고 갚을 건 갚으며 뼈를 깎은 결과다.

 지금도 부채비율 200%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이 있다. 기업들의 활발한 투자를 막아 일자리 창출에 걸림돌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만 묻자. 가장 먼저 부채비율 200%를 맞춘 삼성이 그것 때문에 나빠졌나. 오히려 좋아졌다. 국제 금융시장에서도 얼마든지 자기 신용으로 돈을 빌릴 수 있게 됐다. 더 좋은 금리는 물론 대외 신인도가 높아지면서 주가도 올라갔다. 회사가 커지고 일자리도 늘렸다.

 위기는 오지 않는 게 제일 좋다. 하지만 외환위기로 우리가 얻은 것도 적지 않다. 기업 환경과 금융 시장에 국제 기준이 도입된 것이 그중 하나다. 장미셸 캉드쉬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한국의 외환위기를 ‘위장된 축복(Disguised blessing)’이라고 불렀다. 지금도 그 말에 치를 떠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냉정히 따져보면 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부채비율 200%도 그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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