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이론서로서의 생명 다한 역사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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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공'이라는 말이 쓰이지도 않던 시절, 그러니까 전두환 정권 때다. 유화 국면을 맞아 이른바 이념 서적들에 대한 판금 조처가 다소 완화된 시기가 있었다. 그 유명한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번역 출간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서 어느 술자리에선가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안주 삼아 난상토론이 벌어졌던 기억이 난다(1982년인가 그랬는데 당시에는 〈자본론〉소개서만 몇 권 나왔고 〈자본론〉자체는 1988년에야 번역 출간되었다).

그 자리에 있던 아무도 〈자본론〉을 제대로 읽은 사람은 없었으나 누구도 〈자본론〉이 어떤 책인지 모르지는 않았다. 아무도 읽지 않았는데 누구나 안다. 이 기묘한 부조리는 이념에 인색했던, 슬프고 터무니없는 우리 현대사의 한 자락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정식으로 번역되지는 않았어도 적어도 영문판 〈자본론〉은 복사집에서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고, 일본에서 나온 〈자본론〉해설서도 많이 나돌았던 것이다.

〈자본론〉이 번역 출간되면 뭐가 달라질까? 어떤 친구는 달라질 게 없다고 말했다. "읽을 사람은 다 읽었고 어차피 안 읽을 사람은 번역되어도 읽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이었다(실제로 임원택 선생은 〈자본론〉이 훨씬 더 '뜨거운 책'이었던 70년대 말에 이미 〈자본론〉을 논박한 〈제2자본론〉이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는데, 우리에겐 말하자면 '원본 없는 패러디'였으니 지금 생각하면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어떤 친구는 그래도 달라질 거라고 말했다. 우선 한 사람이라도 더 읽지 않겠는가? 또 〈자본론〉이 지니는 상징적인 의미로 볼 때 이념의 굴레가 풀리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자본론〉은 물론 고전의 반열에 드는 저작이지만, 우리 사회에서 단순한 고전 이상의 의미로 부각된 현상의 배후에는 그때의 술자리 같은 분위기가 있었다. 사실 나는 당시까지 〈자본론〉을 직접 접해보지 못했고, 몇 년 뒤에야 소비에트에서 간행된 영문판 〈자본론〉제1권을 간신히 읽었을 뿐이다. '간신히'라는 말은 내용이 어려워서라기보다는 당시 나 역시도 〈자본론〉이 지니는 상징성에 짓눌렸기 때문이다.

내 결론부터 말한다면 나는 〈자본론〉을 불후의 고전이라고 여기며 언제든 반드시 완독할 작정이다. 게다가 아직은 내 책꽂이에 영문판 복사본으로 꽂혀 있는 데 불과하지만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집필하기 전에 방대한 예비 노트로 작성한 〈정치경제학 비판강요〉도 읽을 계획이다. 그만큼 나는 개인적으로 마르크스에 매료되어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나는 〈자본론〉이 결코 다른 고전들과 구분되는 성전(聖典)이 아니며, 마르크스도 그렇게 여겼으리라고 확신한다.

무릇 고전을 읽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말 그대로 고전으로 읽을 것이냐, 하나의 이론으로 읽을 것이냐다. 이것을 〈자본론〉에 적용하면 이렇다. 〈자본론〉은 자본주의의 원리와 발생 과정을 설명한 하나의 '역사서'인가, 아니면 현대 자본주의의 메커니즘을 분석하는 데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경제 '이론서'인가? 내가 보기에 〈자본론〉은 고전이고 역사서다.

우선 같은 자본주의라는 이름으로 묶이기에는 19세기 중반과 지금은 너무 다르다. 컴퓨터 칩 하나에 들어가는 투하 노동량을 마르크스가 안다면 아마 깜짝 놀랄 것이다. 상품의 가치를 그 생산에 필요한 노동력의 가치로만 따진다면, 반짝이는 아이디어 하나로 떼돈을 번 소프트웨어 업자나 공 하나 잘 던지는 걸로 수백억 원의 연봉을 받는 메이저리그 투수의 경우는 설명할 수 없다.

그래도 산업 자본주의는 구체적이므로 알기 쉬운 편이다. 더 추상적인 금융 자본주의로 가면 〈자본론〉의 입장에 충실할수록 불가해한 일이 더욱 많아진다. 은행이나 보험회사마다 내놓는 '금융 상품'이란 과연 상품일까? 공장에서 생산되지 않고 책상에서 '고안'되는 상품도 있을까? 민간 기업이 평가하는 국가 신인도 지수에 따라 한 나라의 부가 왔다갔다하는 현상은 또 어떨까? 한갓 풍문에도 주가가 제멋대로 오르락내리락하는 주식시장은 어떻게 설명할까?

물론 〈자본론〉은 자본주의의 기본 원리를 분석하는 저작이며, 자본주의는 비록 현대 자본주의라 해도 원리가 변하지는 않았다고 항변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시대에는 자본주의가 지구의 일부분에서 실시되던 새로운 실험이었지만 지금은 보편적인 체제로 굳어졌음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부분과 전체의 차이가 양적인 데에만 있지 않다는 사실은 〈자본론〉의 철학인 변증법에서도 말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자본주의가 곧 자연 질서인 세상에 살고 있다. 수요-공급 곡선이 경제 법칙이 아니라 생활의 자연스런 원리이듯이 자본주의는 순경제적인 현상이 아니다. 어쩌면 자본주의는 인간의 극히 보편적인 본성에 뿌리를 두고 있는 제도인지도 모른다. 그랬기에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단계가 보편적으로 도래하고 난 다음에야 사회주의가 실현될 수 있다고 믿은 게 아닐까?

경제 이론서로서는 수명을 다한 〈자본론〉을 하나의 역사서로 보면 그와는 다른 가치, 즉 고전의 참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 한 예로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개념이 그렇다. 르네상스 인문주의로부터 비롯된 서구의 근대 사상에서 중시되는 것은 언제나 양보다 질이었다. 양화될 수 있는 것을 옹호하는 인간은 속물이었고 도덕적인 숭고함, 섬세한 감성과 낭만적인 열정처럼 질적인 가치야말로 참다운 인간성을 담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질적인 사용가치보다 양적인 교환가치를 훨씬 중시한다(이 점에서 마르크스는 아마 사회주의 활동이 아니었더라도 서구 지식인들에게 이질적이고 불편한 인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도이치 이데올로기〉에서 공산주의 사회의 삶을 목가적이고 서정적으로 서술했던 그에게 '사용가치가 지배하는 참 세상'에 대한 낭만이 없을 리 없다. 다만 그는 미래에 대한 감상으로 현재를 오판하는 오류를 범하려 하지 않았을 뿐이다. 오히려 그의 입장은 말로는 질적인 가치를 부르짖으면서도 행동으로는 양적인 가치를 추앙하는 '진짜 속물들'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자본론〉은 탁월한 시야와 예리한 분석력을 지닌 어느 학자가 '자기 시대'의 본질을 분석한 저작이다. 만약 그 시대가 지금과 같다고 생각한다면 이 저작은 오늘날에도 훌륭한 실천 지침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자본론〉에서 계승해야 할 것은 마르크스의 이론이 아니라 그의 방법론이며, 그 안에 면면히 흐르는 고전의 정신이다.

남경태 (dimeola@cholli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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