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수, 이젠 ‘욱’해도 참지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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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로 변신한 고종수에게서 여유가 묻어 나온다. 고종수 트레이너가 수원 삼성 클럽하우스 내 실내체육관에서 활짝 웃고 있다. [화성=정시종 기자]

50년 만의 강추위가 찾아온 2일. 경기도 화성의 수원 삼성 클럽하우스에도 밖으로 나가기가 무서울 만큼 혹독한 추위가 몰아쳤다. 연습구장에는 쌓인 눈이 얼어붙어 훈련이 불가능했다. 선수들은 고드름이 듬성듬성 매달린 버스에 올라타 인근의 실내체육관으로 이동했다. 고종수(34) 수원 1군 트레이너는 “이렇게 추운 날일수록 스트레칭과 워밍업을 확실히 해야 부상을 당하지 않는다”며 선수들을 다독였다.

 훈련은 오전 10시부터 1시간30분 남짓 진행됐다. 선수들은 훈련 도중 고 트레이너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 “형님”이라 부르며 친근감을 나타냈다. 고 트레이너는 푸근한 웃음을 지으며 선수들에게 장난을 걸었다. 고 트레이너 덕분에 훈련 분위기는 한결 밝아졌다. 지난해 1월 수원 삼성 산하의 유소년팀 매탄고 축구부 코치를 맡았던 고종수는 그해 6월 수원의 1군 트레이너로 승격됐다. 제법 지도자 티가 나기 시작한 고 트레이너를 만났다.

 ◆“너무 솔직했던 게 후회돼”

 고 트레이너는 안정환(36)·이동국(33·전북)과 함께 1990년대 후반 프로축구 붐을 일으켰던 트로이카 중 한 명이다. 안정환은 최근 은퇴를 선언했고, 이동국은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고 트레이너는 “내가 둘에 비해 뒤처진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사회생활은 내가 먼저 하는 것 아니냐”며 웃어 보였다.

 고 트레이너는 트로이카가 활약했던 당시를 회상하며 “그때는 프로축구 인기가 최고였다. 경기장에 사람들이 많으니까 축구할 맛이 났다”고 말했다. 축구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에겐 늘 ‘그라운드의 악동’ ‘풍운아’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자유분방한 발언과 행동으로 구설에 오르기 일쑤였다. 고 트레이너는 자신이 ‘악동’으로만 비치는 것에 대해선 할 말이 많다. “운동선수가 로봇은 아니다. 나는 외부 시선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서 인터뷰할 때도 솔직하게 다 말했다. 그런데 지금은 후회된다. 조금만 그런 기질을 숨겼으면 선수 생활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생각해 본다.”

 ◆“성질 많이 죽었습니다”

 지도자가 된 뒤 가장 달라진 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고 트레이너가 답했다. “이제는 ‘욱’ 해도 한 번 참고, 한 번 생각하고 이야기하려고 노력한다. 지도자는 하나부터 열까지 봐야 하지 않나. 내가 생각해도 조금 달라진 것 같다.”

 그는 대전 시티즌에서 은퇴한 이후 꾸준히 공부를 해 2010년 2급 지도자 자격증을 따냈다. “더 열심히 공부해 1급 지도자를 넘어 P급 지도자 과정까지 도전할 생각”이라며 “지도자의 길로 접어든 이상 감독을 해 봐야 하지 않겠느냐”고 호기롭게 말했다.

 후배들에겐 철저한 몸관리를 당부했다. 자신이 무릎 십자인대 부상으로 고생하다 2009년 은퇴했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나라 선수들은 주로 다리 앞근육을 단련하는데 부상을 많이 당하는 부위는 뒤와 옆쪽이다. 운동 전후로 튜브를 이용한 보강훈련을 꾸준히 해야 부상을 방지할 수 있다”며 노하우를 전수했다.

 고 트레이너는 “선수 시절 많이 마셨던 술도 이제는 줄였다”고 말했다. 슬슬 결혼을 준비할 나이이기도 하다. “요즘은 아이들이 너무 예쁘다”는 그는 “마흔이 넘기 전에는 결혼하겠다. 그런데 아직 인연을 만나지 못했다”고 웃었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축구인생에서 어디쯤 와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전반 30분이 지난 상황에서 0-3으로 뒤지고 있다. 전반에 한 골을 만회하고 후반에 4-3으로 역전할 자신이 있다”고 말했다. “트레이너로 하나씩 배워 가는 과정이 첫 골”이라고도 했다. 그는 축구인생의 후반전에 어떻게 세 골을 넣어 역전승할까.

화성=오명철 기자
사진=정시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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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소속기관

생년

[現] 수원삼성블루윙즈 1군트레이너

197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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