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스 & 굿바이 … 안정환, 은퇴 공식 발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4면

‘한국의 데이비드 베컴’.

 안정환(36)의 스타성을 간파하고 그를 부산 대우로얄스(현 부산 아이파크)로 데려왔던 안종복(56) 당시 단장(현 남북체육교류협회장)의 평가다. 안 전 단장은 최근 펴낸 자서전 ‘비상’에서 안정환과의 추억을 이야기했다. 1999년 K-리그 최우수선수(MVP)로 뽑히는 영광도, 2002년 한·일 월드컵 골든골 때문에 억울하게 이탈리아 페루자에서 방출되는 시련도 함께 겪은 그의 말이라 고개가 끄덕여진다.

 ‘반지의 제왕’ 안정환이 그라운드를 떠난다. 안정환은 지난달 31일 서울 리츠칼튼호텔에서 은퇴 기자회견을 열고 14년의 현역생활을 마무리했다. 안정환은 “울지 않겠다”는 다짐과는 달리 뜨거운 눈물을 보였다. K-리그 복귀를 끝까지 고심하던 안정환은 결국 ‘박수칠 때 떠나는’ 선택을 했다.

 ◆축구는 ‘구원’

 안정환은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 없이 자랐고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안정환은 이모집과 외할머니집을 전전했다. 가족의 정이 너무도 그리웠다. 안정환은 지금도 축구만큼이나 가족을 끔찍이 아낀다. 2001년 결혼한 아내 이혜원(33)씨의 이름을 몸에 문신으로 새겼다. 딸 리원(8)과 아들 리환(4)의 이름은 ‘리틀 혜원’ ‘리틀 정환’의 준말이다. 가족에게 받았던 상처를 가족으로 치유했다.

 그에게 축구는 유일한 위안이었다. 남들의 인정을 받았고 삶의 재미를 느끼게 해줬다. 아주대를 졸업하고 1998년 부산에 입단하면서 전성시대가 열렸다. 안정환은 그해 이동국(33·당시 포항)에게 신인상을 넘겨줬지만 팬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이듬해 MVP를 차지하며 정상급 선수로 올라섰다.

 상대를 절묘한 트래핑으로 제쳐내는 드리블은 안정환의 트레이드 마크다. 유연하면서도 현란한 드리블은 서울 대림초등학교 시절 은사였던 피은형(51) 감독이 기계체조를 시킨 덕분이었다. 안정환은 실력과 더불어 조각 같은 외모로 오빠부대를 몰고 다녔다. 소녀 팬들이 하도 몰려드는 통에 소속팀이 숙소를 옮길 정도였다.

<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국제 저니맨

 2000년 이탈리아 페루자에 진출한 안정환은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두 골을 넣으며 선수생활의 정점을 찍었다. 그러나 이탈리아와의 16강전에서 골든골을 넣었다는 죄(?)로 소속팀 페루자에서 방출됐다. 이후부터 떠돌이 생활이 시작됐다. 진통 끝에 일본에 둥지를 튼 안정환은 시미즈에서 54경기 26골, 요코하마에서 43경기 21골을 넣으며 성공가도를 달리는 듯했다.

 그러나 2005년 유럽 진출 이후 시련을 겪었다. FC메츠(프랑스)와 뒤스부르크(독일)에서 총 28경기에 출전해 4골을 넣은 게 전부였다. 2007년 수원 삼성으로 돌아왔지만 “한물갔다”는 평가에 고개를 떨궈야 했다.

 2009년 중국 프로축구 다롄 스더에 진출해 지난해까지 뛰었다. 다롄 구단은 은퇴를 선언한 안정환에게 1~2년 정도 더 뛰어줄 것을 요구했지만 출전 기회가 뜸해진 안정환이 고사했다. 구단은 ‘다롄의 왕’으로 불린 안정환을 위해 지난해 10월 성대한 은퇴경기를 열어줬다. 구단은 “왜 이리 급하게 떠나는가? 당신과의 추억을 마음속에 간직하겠다’는 내용의 노래를 틀어줬고, 경기장을 가득 메운 3만 관중은 안정환을 연호했다.

오명철 기자

사진

이름

소속기관

생년

[前] 중국다롄스더 축구선수(최전방공격수(FW))
[前] 2010년남아공월드컵국가대표팀 선수(최전방공격수(FW))

1976년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