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도 견제한 '21세기 문익점' 이종남 박사, 딸기 독립선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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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남 박사가 26일 강원도 강릉시 고령지농업연구센터 온실에서 ‘고하’와 ‘설향’을 교배 한 딸기를 들어 보이고 있다. 이 딸기는 신품종 을 개발하기 위해 사용된다. 여름딸기인 고하는 현재 생산 시기가 아니다. [변선구 기자]

“닥터 리(Dr. Lee)에게 주면 절대 안된다.”

미국 딸기 농업을 좌지우지하는 캘리포니아주립대(UCLA) 연구팀이 한국 농가에 딸기 모종을 팔 때 붙였던 조건이다. 닥터 리는 대관령 고령지농업연구센터의 ‘딸기박사’ 이종남(46) 연구사다. UCLA의 단속은 이 박사의 신품종 개발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이 박사도 팔짱만 끼고 있을 수 없었다.

국내서 확보가 어려워지자 해외 출장을 갈 때면 어떻게든 딸기를 구했다. 농민을 구슬리기도 하고 슬쩍 따오기도 했다. 품종 개발 경쟁을 ‘총성 없는 전쟁’에 비유하지만 미국의 신품종 딸기 밭은 무장한 경비원이 지킨다. 첩보전 같았던 품종 연구의 결실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26일 농촌진흥청은 3월께 캄보디아 업체와 딸기 로열티(특허 품종에 대한 사용료) 계약을 체결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딸기로는 첫 로열티 계약이다. 올해부터 한국에서 자라는 모든 해외 품종 식물에 대해선 재배 농가가 로열티를 내야 한다. 수세적이었던 한국이 본격 품종 전쟁이 시작되는 첫 해에 반격을 나선 것이다.

 이 박사의 전쟁은 19년 전부터 시작됐다. 원예학과를 나온 그는 93년부터 고령지농업연구센터에서 파프리카 품종 개발로 경험을 쌓았다. 2000년엔 고온 재배가 가능한 여름딸기를 주목했다. 한국에서 주로 먹는 딸기는 저온에서 재배되는 겨울딸기다. 이씨는 “일본에서 연간 5000t을 수입하는데 우리는 고작 400t을 생산하고 있었다”며 “더운 동남아 등에서도 기회가 있다고 봤다”고 말했다.

 도전은 길었다. 일반적 식물은 씨앗에 대한 유전자 분석만 하면 품종 개발을 할 수 있다. 변이가 심한 딸기는 다르다. 씨앗 하나 입수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1만 개를 교배하면 1만 개의 특성이 다 달랐다.

문익점식 딸기 확보가 국제 규정에 어긋나지 않는 이유도 하나 슬쩍 가져가 봐야 써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박사팀은 고작 8명,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다.

 작전도 잘 짰다. 정부는 시간을 벌어줬다. 한국은 2002년 국제식물신품종보호동맹(UPOV)에 가입했지만, 외국 품종 비율이 높은 딸기 등은 일괄적 로열티 적용 시점을 10년 후로 미뤘다. 한·일 딸기 로열티 협상은 결렬시켰다.

발등의 불은 국내 소비의 주종인 겨울딸기였다. 이 박사의 선배 박사들이 달라붙었다. 당시 30%에도 못 미쳤던 겨울딸기의 국산 점유율은 올해 70%로 높아졌다. 이 박사는 "겨울딸기 외교를 잘 한 덕에 아낀 로열티가 100억원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시간을 번 사이 고랭지 품종에 밝은 이 박사는 여름딸기에 집중했다. 방어와 함께 공격 무기를 만든 셈이다.

 한국산 여름딸기 ‘고하(高夏)’는 연구 8년 만인 2008년 1월 탄생됐다. 아버지는 영국산인 플라멩코, 어머니는 네덜란드산인 엘란이다. 고하(당도 9.5도)는 아버지 플라멩코(당도 8~8.5도)보다 더 달다. 수입 품종은 한 포기당 종묘 비용이 로열티 등으로 인해 최대 1000원꼴이지만, 고하는 300원이다.

 국내에선 강릉·무주 등에 재배 단지가 생겼다. 해외에선 고온으로 딸기 재배가 어려웠던 캄보디아에서 지난해부터 시험재배를 진행 중이다. 올해는 베트남 등으로 영역을 넓힐 예정이다. 농촌진흥청은 중국과 베트남에서 품종특허 출원을 완료했다.

 이 박사의 품종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세계 품목·종자 시장에서 한국산이 차지하는 비중은 1.5%에 불과하다. 올해 한국이 줘야 할 로열티는 205억원에 이른다. 그는 “국산 품종을 로열티를 받는 단계까지 끌어올려 보람이지만 이제 시작일뿐”이라고 말했다. 이 박사는 오늘도 제2의 고하를 연구하느라 대관령 연구센터와 강릉의 재배장을 오간다.

김영훈 기자

◆문익점=고려시대 문인. 1363년 원나라에 갔다 귀국하며 붓대 속에 목화씨를 감춰 들여왔다. 3년여 노력 끝에 목화 재배에 성공했다. 이로 인해 얇은 베옷을 입고 겨울을 나야 했던 일반 백성이 목화 실로 만든 겨울 옷을 입을 수 있게 됐다.

이종남 박사의 딸기 전쟁 자료:농촌진흥청

1993년 고령지농업연구센터 입사

2002년 한국, 국제식물신품종보호동맹(UPOV) 가입

2006년 5월 한·일 딸기 로열티 협상 결렬

- 로열티 지급 시기 늦추며 품종 개발 주력

- 이종남 박사, 문익점식 딸기 품종 확보. 수만 번의 교배 실험

2008년 1월 여름딸기 ‘고하’ 개발 완료

2011년 6월 캄보디아 농업회사, ‘고하’ 시험재배 시작

2012년 1월 한국, 품종보호 대상을 모든 식물로 확대

- UPOV 규정 따라 해외 종자·품종은 모두 로열티 지급

2012년 1월 중국·베트남에 고하 품종보호 출원 완료

2012년 3월 캄보디아 농업회사, 로열티 계약 체결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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