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실 출산 문화’ 만들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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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4호 31면

인간은 땅 위의 동물이다. 땅에서 나는 음식을 먹고 땅을 딛고 살아간다. 죽어선 땅으로 돌아간다. 그렇기에 옛 사람들은 훌륭한 인물을 만드는 게 땅의 힘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라 말해 왔다. 훌륭한 인물이 되려면 명당의 좋은 기운을 받는 것이 필수라고 여겼다. 근대화 이후에 이런 사상들을 우리는 미신이라고 말하면서 뒷전으로 밀어냈지만, 미묘한 우주의 진리는 도리어 지식의 잣대 너머에 존재할 수 있다.

학교폭력이 난무하는 요즘 세태를 볼 때 가장 중요한 원인 중 하나는 인간의 탄생과 가정교육의 잘못에 근본 원인이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학교교육만이 교육의 전부인 양 몰아대서는 안 된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요긴한 지혜는 학교교육에서 얻는 지식보다 자연과 우주에서 얻는 진리가 최상이고, 그 다음은 가정교육이라는 점을 사회가 먼저 각성해야 한다.

그러자면 태어난 이후의 교육보다 임신 중 어머니 배 속에서의 교육이 더욱 중요하다. 또 태교보다 더욱 중요한 게 회임(懷妊)할 때의 장소와 시간이라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명당 터에서 받는 땅 기운인 지기(地氣), 좋은 일진(日辰)을 택한 하늘 기운인 천기(天氣), 밝고 건강한 남녀의 기운인 인기(人氣), 그 셋이 정성으로 합해져서 태어나는 새 생명이 어찌 훌륭한 인품으로 성장하지 않을 수 있으랴. 옛사람들은 곡식의 씨앗을 뿌릴 때도 비 오고 바람 불거나 번개 치는 날은 피했다. 하물며 사람이 자식을 낳을 때 더 정성을 쏟아야 함은 두말 할 나위 없다.

그래서 옛날에 신혼의 자식을 둔 부모는 합방의 택일, 음식, 자세 등을 엄격히 가리고 조심하도록 제한했다. 그 이유는 인간 탄생에 대한 숭엄한 희구와 지극한 정성 때문이지 결코 쓸데없는 간섭이나 미신이 아니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웬일인지 태어난 이후에야 과외니, 학군이니, 유학이니 하면서 학부모들이 온갖 난리를 치면서도 정작 인간 탄생의 가장 중요한 잉태의 순간에는 모두 둔감하고 무심하다. 천지 기운이 이 땅과는 전혀 딴판인 해외 신혼여행지나 유원지의 복잡한 호텔에서 방만한 초야를 치르다 첫 임신을 하지나 않았는지 반성해 볼 일이다. 태아가 인간 염원의 소산으로 태어나는 것과 우연한 유희의 결과물로서 태어나는 것 사이에서 그 생명의 무게는 천지만큼이나 차이 난다.

부부가 최상의 조건에서 낳은 인재(人材)는 가정의 행복이기도 하지만 국가 미래를 밝게 만드는 힘이다. 오늘날 빈발하는 학교폭력이란 사회 문제 역시 아이들을 잉태하는 시점부터 간절한 염원과 정성이 미치지 못한 데 먼 원인이 있다고 본다. 생각이 있는 부모라면 지기가 좋은 방에서 회임하고 지기가 좋은 방에서 몸을 풀어야 한다. 천지가 조화를 이루는 땅 기운이 좋은 방을 우리 조상들은 영실(靈室)이라고 불렀다.

우리 강산엔 세계 어느 곳보다 명산대천(明山大川)이 많다. 영기가 서려 있는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그런 곳에 훌륭한 인재가 태어날 수 있는 영실을 지어 신혼부부들을 위한 초야의 방을 만들어 주자. 산 좋고 물 좋은 땅에서 새 삶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고 멋진 새 생명을 잉태할 수 있도록 해주자. 해외호텔의 현대적 호화시설보다 깊은 산천의 고요한 오두막이 훨씬 더 불편하겠지만 영험한 기운은 도리어 그런 불편한 곳에서 나온다.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을 사랑했던 선현들의 고택(古宅)들은 모두 그런 명당이었다. 거추장스럽게 생각해온 전통 고택들을 되살리는 방법도 생각해 보자. 청정한 기운을 타고난 이 나라의 동량재들을 탄생시킬 우리의 ‘영실 문화’를 만들어 나가자. 천기, 지기, 인기가 어우러진 인걸은 우연히 탄생하는 게 아니다.



김양동 서예가. 경북 의성 출생. 경북대 국문과 졸업 뒤 성균관대 박사과정(한문과)을 수료했다. 이기우 선생에게 서예·전각을, 임창순·신호열 선생에게 한문을 각각 수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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