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영아의 여론女論

여성들의 ‘메이저리그’ 진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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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이영아
명지대 방목기초교육대학 교수

“구씨의 소청이 있으니 그 소청인즉 옥련이가 구씨와 같이 몇 해든지 공부를 더 힘써 하여 학문이 유여한 후에 고국에 돌아가서 결혼하고 옥련이는 조선 부인 교육을 맡아 하기를 청하는 뜻 있는 말이라…구씨의 목적은 공부를 힘써 하여 귀국한 뒤에 우리나라를 독일국같이 연방제를 삼되 일본과 만주를 한 데 합하여 문명한 강국을 만들고자 하는 비사맥(비스마르크, Otto Eduard Leopold Bismarck) 같은 마음이요 옥련이는 공부를 힘써 하여 귀국한 뒤에 우리나라 부인의 지식을 넓혀서 남자에게 압제 받지 말고 남자와 동등 권리를 찾게 하며 또 부인도 나라에 유익한 백성이 되고 사회상에 명예 있는 사람이 되도록 교육할 마음이라.”(이인직, ‘혈의 누’, 1906)

 1900년대 근대국가 형성에 대한 담론이 활발해지면서 새로운 국가에서는 여성들도 남성들과 동등한 권리를 누리기 위해 ‘부인단체’가 필요하다는 논의가 제기되었다. 여성들도 스스로 단체를 조직·결성하여 단결된 힘을 보여주고, 사회를 향해 목소리를 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부인단체’라는 말이 좀 묘하다. 당시의 부인단체는 한편으로는 여성의 권익 신장 운동의 준거점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여성의 활동 영역을 ‘여성사회’ 내부로 제한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이 시기 소설 ‘혈의 누’에 나타난 위 인용문과 같은 대목이다. 구완서는 옥련에게 위와 같이 자신과 함께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자신은 조선을 위해, 옥련은 조선 부인을 위해 일하자고 제안한다. 옥련도 이에 동의한다. 즉 남성이 교육을 받으면 나라를 문명한 강국으로 만드는 데에 기여할 수 있는 반면, 여성이 교육을 받으면 여성을 교육하고 여자사회를 조직할 수 있는 데에 그친다.

 이해조의 소설 ‘홍도화’(1908)에서도 여학교를 다니던 주인공 태희는 자신이 졸업을 하면 ‘여자사회의 영수(領袖)’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말한다. 이처럼 근대 이후에도 오래도록 여성들의 사회 진출은 남성들이 지배하고 있는 주류사회에까지는 미치지 못한 채 ‘마이너리그’에 머물러야 했다.

 그런데 최근 공교롭게도 한국 내 주요 정당의 ‘영수’ 자리를 모두 여성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여성들이 ‘메이저리그’에 진출했을 뿐 아니라 그곳에서조차 맨 앞자리에 서게 되었다니, 실로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분명 어떤 ‘진전’임이 틀림없지만 사실 이런 성취는 피상적인 것이다. 세상에는 ‘무늬만 여성’인 여성도 허다하며, 남성이 무조건 적군이 아니듯 여성도 무조건 아군은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의 정치계 여성 리더들이 정말 그 자리에 오를 만한 자격과 자질이 있는지는 그들의 행보를 예의주시하여 더 세심하게 검증해야 한다. 부디 그들이 여성뿐 아니라 이 사회의 모든 ‘마이너리거’들을 위해 힘껏 싸워 주기를 기대한다.

이영아 명지대 방목기초교육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