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지메르만이 앙코르 무대서 극찬한 “Mr. Lee”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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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종열씨가 조율 중인 피아노에 잠시 몸을 기댔다. 이씨는 “조율을 할 때 잡생각을 하면 먼저 피아노가 알고 결국에는 관객들이 알게 된다”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88개의 건반, 230여 개의 줄을 가진 피아노는 예민한 악기다. 부품이 1만2000여 개나 되는 ‘그랜드 피아노’는 복잡한 기계 장치를 닮았다. 이런 피아노에서 소리를 뽑아내는 조율사는 음악과 기계가 만나는 경계에 서 있는 사람이다.

 12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서울시향과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2번 협연을 앞둔 피아니스트 아르카디 볼로도스(40)가 리허설을 앞두고 조율사 이종열(74)씨를 불렀다. 러시아 출신의 피아니스트는 건반을 쳐보면서 피아노 왼쪽 페달을 조금 옮겨 달라고 요구했다. ‘소프트 페달’이라고 불리는 왼쪽 페달은 건반을 움직여 피아노 소리가 작게 나게 한다.

 이씨는 “55년간 피아노 조율을 했지만 처음 만나는 피아니스트를 대할 때는 항상 긴장이 된다”고 말했다. 이씨는 이날 만남에 앞서 볼로도스의 체격과 연주 동영상을 봤다고 말했다. “피아니스트의 연주 스타일과 체격에 따라서도 조율하는 방식이 조금 다를 수밖에 없어요.”

지메르만

 리허설이 끝나고 볼로도스가 막 연주를 마친 따끈한(?) 피아노가 무대 뒤로 끌려왔다. 시가 2억5000만원짜리다. 장정 세 사람이 달라 붙어 악기보관소로 옮겼다. 항온항습기가 ‘윙’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이곳에서 이씨가 와이먼의 곡 ‘은파(Silvery Waves)’를 연주했다. 이따금 건반을 잘못 짚어 음정이 안 맞기도 했지만 10평 남짓한 실내는 금방 따뜻한 피아노 소리로 채워졌다. 이씨는 “연주도 조율의 일부”라고 했다.

 -왜 직접 연주를 하나.

 “연주를 해봐야 피아노 상태를 확인할 수 있다. (건반의) 터치감을 확인하려면 조율사가 직접 쳐보고 느낌을 알아야만 한다.”

 그는 피아노줄 사이사이에 빨간색 천을 끼워 넣고 라음(A음)을 치고 튜닝기를 보면서 피아노줄을 조였다. 소리의 기준을 잡던 소리굽쇠가 튜닝기로 바뀌었을 뿐 이씨의 조율 방식은 55년 전 그대로, 오직 귀에만 의존한다.

 -튜닝기를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뭔가.

이씨가 튜닝 해머로 피아노 줄이 감겨 있는 ‘튜닝핀’을 돌려 음을 맞추는 모습. 피아노는 건반마다 2~3개의 줄을 때려 소리를 내기 때문에 조율하지 않는 줄은 천을 끼워 고정시켜 놓는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기계에만 의존하면 각 건반의 소리를 정확히 할 수 있지만 전체의 조화를 이뤄내기가 어렵다. 피아노가 부드럽다든지 거칠다든지 그런 것을 봐야 한다.”

 이씨는 전북 전주에서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전주공고 3학년 겨울방학 때 교회 풍금으로 서양음악과 처음으로 만났다. “한학자인 할아버지 때문에 몰래 다닌 교회에서 반주자가 연주 기술이 부족해 풍금으로 멜로디만 치더라 ‘저걸 배워서 연주하면 어떨까’라는 욕심이 생겨 오르간 교본을 구해 매일 교회에 다니면서 한 달 만에 연주를 익혔다”고 했다.

 하지만 풍금 소리는 화음을 연주할 때마다 엉뚱한 소리를 냈다. 풍금을 분해해 리드(풍금에서 소리를 내는 부분)를 만졌지만 뜯을 때마다 이상한 소리를 냈다. 조율이라는 미로 찾기가 시작된 것은 그때부터다. 일본제 풍금이라서 관련 책자가 있을 같아 전주 시내 모든 서점을 뒤졌지만 책이 없었다. 그러던 중 시내 한 일본어 책방에서 ‘조율(調律)’이라는 책 제목과 처음으로 만났다.

 -어떤 기분이었나.

 “지금도 기억하는데 책 제목이 ‘피아노 구조와 조율, 수리’였다. 그걸 보고서야 ‘내가 하려던 것이 조율이었구나. 그런 말이 있었는데 내가 모르고 있었구나’라고 생각했다.”(웃음)

 책값은 상상 이상이었다. 당시 기준으로 보리 4가마니 돈을 주고서야 주문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농사일을 물려 받아야 한다고 말렸지만 작은아버지가 “기술을 배우면 먹고살기는 할 것”이라며 설득했다고 한다.

 석 달을 기다려서 책을 받았지만 일본어에 서툴러 일본어 공부를 하고서야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조율을 마치고 교회 풍금에서 나던 아름다운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남아 있다”고 했다.

 군대를 마치고 서울로 왔다. 조율과 연주를 겸해 ‘피아노 치는 조율사’로 입소문이 났다. 피아니스트 윤보희·김원복씨 등의 피아노를 조율했고 세종문화회관·호암아트홀·예술의전당 등에서 일했다.

 항상 무대 뒤에서 일하는 이씨지만 55년의 조율 인생 동안 무대에서 이름이 불린 적이 한 차례 있다. 2003년 폴란드 출신 피아니스트 크리스티안 지메르만(Krystian Zimerman)이 내한했을 때다. 피아노와 조율사를 항상 대동해 연주 여행을 떠나는 완벽주의자 지메르만이 조율사를 데려오지 못해 이씨가 대타로 피아노를 매만졌다. 앙코르곡 연주를 마친 지메르만이 이례적으로 무대에서 “미스터 리에게 감사한다”며 관객들의 박수에 화답했다. 지메르만이 마음에 차지 않을까 봐 이미 5대의 피아노를 조율해 놓고 대기하던 이씨였다.

 이씨는 2007년 ‘조율명장 제1호’로 뽑혔다. 집에서도 정장을 입지 않고는 피아노 앞에 서지 않는다. “세상에 쉬운 일은 없다. 끊임없이 노력하고 끈기를 가지고 하면 안 되는 일은 없다”며 자리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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