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의 한(恨)은 어디까지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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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 Books 편집장

#01. 분단으로 잃어버린 우리의 시인 조운(1900∼?) 님과 그의 시가 요즘 문단의 화제다. 올해가 그의 탄생 1백년을 맞이하는 해이고, 이에 맞춰 조운 탄생 1백주년 기념 사업이 활발히 진행되는가 하면, 지난 달에는 그의 탄생지인 전남 영광에 건립하려던 시비 훼손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에 국가정보원이 개입됐다는 의혹이 나와 기념사업회(명예회장 송영)를 비롯, 민족문학작가회의(이사장 이문구)와 민족예술인총연합(이사장 김윤수)측에서는 기자회견을 갖고 국정원에 진상조사와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다. 분단 50년 만에 조운 님의 〈조운 시조집〉(조운기념사업회 엮음, 작가 펴냄)이 출간돼 독자들의 관심이 일어날 즈음일 뿐 아니라 남북한 정상이 만나고, 이산가족 상봉을 앞둔 시점에서 벌어진 사건이어서, 문단 밖에서도 관심은 증폭됐다.

지난 8월 23일 국정원에서는 영광 주재 국정원 직원 중 한 명의 아버지가 6.25 전쟁 당시 좌익활동 인사들에 의해 가족과 친지들이 다수 희생된 까닭에 구원(舊怨)이 있으며, 조운 기념사업에 대한 적극적인 반대운동을 벌이고 있는 데에서 비롯된 오해일 뿐, 국정원은 전혀 관계한 바 없다는 해명서를 보내왔다. 영광 교육장이 시비 건립지로 영광 교육청사 부지를 제공한 것이 문제로 대두, 자진해서 철거한 것이라고 밝혔다. 결국 오는 9월 2일 오후 5시 영광군 영광읍 한전문화회관 앞에서 열릴 예정이라고 기념사업회 측은 밝혔다.

이 사건은 남북 화해 분위기에 들떠 있는 우리에게 적지 않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김대중 님과 김정일 님이 서로 만나고, 헤어졌던 남북의 가족이 50년 만에 재회하는 장면을 바라보며 우리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곧바로 통일이라도 되고, 50년 동안 분단으로 인해 야기된 모든 문제가 한꺼번에 사라질 것처럼 낙관하는 분위기였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휴전선의 철조망을 걷어내고, 소떼가 오락가락한다 해서 민족문제가 모두 풀리는 것이 아님을 이 사건은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전남 영광지역은 우리나라 분단 역사상 좌우익의 대립이 첨예했던 대표적인 지역 가운데 하나로, 한국전쟁 당시 총 인구 약 10만명 가운데 3만6천명이 이념 대립 문제로 살해되거나 학살당했다고 한다. 이 가운데 월북 시인인 조운 님은 사회주의 계열 지식인 그룹에 속해있었고, 이번에 사건 의혹 당사자로 지명됐던 국정원 관계자의 아버지 안 아무개 님은 우파 계열의 주요 인사였다. 안 아무개 님의 경우 4형제 중에 3명이 좌익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이는 꼭 영광이라는 작은 지역에 한정된 문제는 아니다. 분단의 아픔을 간직한 이 나라 어디에나 잠재된 문제라 아니할 수 없다. 이른바 '레드 컴플렉스'가 다른 어떤 이데올로기에 우선했던 시절이 그리 먼 이야기는 아닌 곳이 바로 이 땅이다. 이산가족이 만나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눌 때에도 남쪽 가족과 북쪽 가족이 내놓는 이야기에 담긴 사상적 차이를 우리는 확실히 봤다. 결코 쉽게 풀릴 문제는 아니라고 이야기했다.

김대중 님이 김정일 님과 손을 잡는 감격적인 장면을 바라보는 이 땅의 사람들의 느낌은 이미 그 동안 뼛속 깊이 뿌리박힌 이데올로기에 의해 극단적이었을 것이다. 물론 민족 화해라는 대의명분이야 표면적으로는 누구나 다 환영하는 분위기였으나, 형제, 이웃간에 서로 총부리를 겨누었던 좌 우 양 극단의 사람들이 어떻게 같은 느낌을 가졌겠는가.

민족통일이라는 지상 과제를 풀어내기 위해서는 이처럼 민족 내부에 잠재해 있는 본질적 모순을 해소하는 일에 적극 나서야 한다. 조운 님의 시집과 그를 둘러싼 이른바 '현대판 좌우대립'에 대한 관심은 그래서 이 즈음에 더욱 의미를 가진다. 조금 흥분해서 이야기히자면 조운 님의 시와 활동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전제되지 않는 한 민족 문제는 여전히 제자리 맴돌기만 거듭하게 될 것이다.

#02. 식민지 시대 문단 좌파 계열의 핵심 활동가였던 조운 님의 시 한 수 음미하고 조운 님의 시를 이야기하자.

투박한 나의 얼굴
두툴한 나의 입술

알알이 붉은 뜻을
내가 어이 이르리까

보소라 임아 보소라
빠개 젖힌
이 가슴.
- '석류' 전문

훼손 시비가 있었던 시비에 새겨 넣은 시 '석류'의 전문이다. 전형적인 시조 형식을 채용한 이 시에는 노산 이은상 류의 기교는 찾아볼 수 없지만, 질박하면서도 깊은 작가의 속 마음을 그대로 들여다보는 듯한 아름다움이 있다. 석류의 색깔과 형체에 작가의 느낌을 그대로 이입했다.

사람이 몇 生이나 닦아야 물이 되며 몇 劫이나 轉化해야
금강에 물이 되냐! 금강에 물이 되나!

샘도 江도 바다도 말고 玉流 水簾 眞珠潭과 滿瀑洞 다 고만두고 구름 비 눈과 서리 비로봉 새벽안개 풀끝에 이슬되어 구슬구슬 맺혔다가 連珠八潭 함께 흘러

九龍淵 千尺絶崖에 한번 굴러보느냐.
- '구룡폭포' 전문

사설시조 형식의 절창이다. '〈조운 시조집〉은 책이 아니고 차라리 스승이었다'고 하는 시인 유재영 님은 이 시의 문학적 구조를 '기적'이라면서 "문자와 형식에 결박당하지 않으면서 이렇게 당당한 정형의 모습을 보여주다니! 삶과 죽음을 하나로 연결하는 폭포는 조운에게 있어서 공동체적 사물일 수밖에 없었다"고 극찬하고 있다.

조운 님의 초기 시는 서구의 문예 사조를 받아들였던 다른 시인들과 같이 자유시를 따랐다. 그러나 그는 시조 창작을 복고주의로 비판하던 시절에 도리어 서구 문예사조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우리 문단 풍조에 대한 저항의 수단으로 우리의 옛 것에서 활로를 찾고자 한 것이다.

이같은 저항 의식에서 나온 그의 시조는 애초부터 '시조부흥운동' 류의 관념적 복고주의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는 시조가 굳이 민족의 옛 것에 맞는 복고적 내용만 담아야 하는 복고주의 형식이 아니라는 것을 증거하고자 무진 애썼다.

잠고대 하는 설레에 보던 글줄
놓치고서

책을 방 바닥에
편 채로 엎어놓고

이불을 따둑거렸다
빨간 볼이 예쁘다.
-'잠든 아기' 전문

가다가 주춤
머무르고 서서
물끄러미 바래나니

산뜻한 너의 맵시
그도 맘에 들거니와

널 보면 생각히는 이 있어
못견디어 이런다.
-'야국(野菊)' 전문

형식이 시조일 뿐 그가 이용하고 있는 시어나 이미지는 현대 자유시에서나 봄직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른바 현대 시조의 정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조운 님이 그려낸 정감은 오늘 날 우리에게도 그대로 전해지는 듯 하다.

#03. 시인 조운 님은 1900년 음력 6월 26일 전남 영광읍 도동리에서 아버지 조희섭 님과 소실인 어머니 김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 출신이다. 그는 서출임을 숨기거나 부끄러워 하지 않았고, 1903년에는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와 살았다.

20세 이전까지는 한문을 배운 그는 영광읍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현재의 목포상고 전신인 목포 상업전수학교를 다녔다. 19살 때에는 동갑내기 김공주와 결혼, 딸 둘을 낳은 뒤 1924년 협의의혼했고, 29년 영광 보통학교 교사였던 노함풍과 결혼해 아들 셋을 낳았다.

그의 문단 활동은 21년 동아일보에 '불살러 주오'를 발표하면서 시작됐다. 이후 23년부터는 영광중학원에서 작문과 문예교사로 재직했는데, 이때 동료 교사인 박화성 님을 발굴, 춘원 이광수 님에게 추천해 근대 여류 소설가로 키우는 역할도 했다. 소설가 서해 최학송 님과도 교분이 깊었는데, 3.1운동 직후 만주 지방에서 만난 뒤 교우관계를 유지하다 나중에는 최학송 님이 조운의 여동생과 결혼하게 됐다.

30년대부터는 항일 민족자각운동의 일환으로 독서회인 갑술구락부를 결성, 고서화 전람회, 문학강연회 등 갖가지 문화운동을 주도했다. 그가 2년간 옥고를 치르게 된 것은 37년 9월 일본 경찰이 영광 청년들을 탄압하기 위해 날조한 이른바 '영광체육단 삐라사건'이었다.

영광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직을 맡기도 했던 그는 47년 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사해 〈조운 시조집〉을 내고 동국대에서 '시조론' '시조사' 등의 강으를 하다가 49년 월북을 단행했다. 북한에서 그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과 고전예술극장 연구실장등을 지낸 것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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