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B] 스타열전 (31) - 노마 가르시아파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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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를 지닌 부챗살 타법, 강한 어깨, 유격수로서의 폭넓은 수비,빠른 발,1997년 메이저리그 팬들은 노마 가르시아파라의 플레이에 완전히 매혹 당하고 말았다.

그 이전까지 낮설었던 이 선수는 그해가 풀타임 메이저리거로서의 첫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의 맹활약을 펼치며 1995년이후 침체되어 가고 있던 전통의 명문구단 보스턴 레드삭스의 등불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해 노마 가르시아파라는 뛰어난 활약을 펼친 끝에 아메리칸리그 ‘올해의 신인상’을 수상, 정규시즌 4위에 머무르며 2년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이 좌절된 보스턴 구단의 자존심을 지켜주었다.

우리에게 노마 가르시아파라라고 잘 알려진 그의 풀네임은 ‘안토니 노마 가르시아파라’다. 그는 워터 게이트로 유명한 전 미국 대통령 리처드닉슨의 고향, 캘리포니아 위티에에서 1973년 7월 23일 아버지 라몬과 어머니 실비아 사이의 첫아이로 태어났다.

그의 이름 노마(Nomar)는 노마 가르시아파라의 아버지 라몬 가르시아파라가 지은 것으로, 자신의 이름 라몬(Ramon)을 거꾸로 해 만든 독특한 이름이었다.

그의 퍼스트네임 안토니는 그러한 사실을 안 노마 가르시아파라의 어머니 실비아가 사람들의 놀림감이 될 것을 염려해 만든 것이었지만 그의 세컨드 네임 노마는 그의 멋진 플레이를 본 사람들이 그를 더욱 잊혀지지 않게 만드는 매력적인 이름이 되어버렸다.

4남매 중 첫째였던 그는 9살이 될 때까지 동생들이 없었다. 그러한 그에게 네살 위의 삼촌 빅터는 좋은 친구이자 형이었다. 그러한 삼촌 빅터와의 관계가 그를 오늘날의 스포츠 스타로 만들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어렸을때 그는 축구, 야구, 미식축구를 즐겨하는 아이였지만 덩치가 크거나 뛰어난 재능을 가진 아이는 아니었다. 다만 그는 진지하고 열심인 그런 아이였다.

벨플라우어에 있는 성 요한 보스코 고등학교에 입학해 야구선수로서의 경력을 시작했을 때도 상황은 비슷했다. 고등학교에 입학 당시 그의 체구는 160cm가 되지않는 야구선수로서는 작고 깡마른 체구의 소유자였지만 그는 언제나 진지했다.

그는 입학 첫해 자신에게 맞겨진 2루수와 투수의 자리를 그런데로 잘 메꾸었고 2학년때부터 서서히 재능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2학년때 포수와 3루수를 오가던 그는 3학년때부터 지금의 포지션인 유격수 자리로 나서게 되었다.

이후 고등학교 시절 그는 줄 곳 유격수자리를 차지하게 되었고 3학년때 팀의 1번타자로 타율 5할 3푼 6리, 도루 14개, 36득점을 기록하는 맹활약을 펼쳤다.

졸업할 당시 그는 보스코 고등학교 최고의 스포츠 스타가 되었으며 자그마했던 그의 체구도 현재의 체구인 183센티미터에 이르렀다. 이러한 그를 메이저리그 관계자들이 가만히 둘리 만무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그에게 밀워키 브루어스 구단은 5번라운드에서 그를 지명하며 유혹의 손길을 뻗쳤지만 그는 자신이 아직 프로에 갈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느꼈고 조지아 공대로의 진학을 결정했다.

당시 그는 미식축구, 축구, 야구의 고등학교 스타플레이어였지만 공부를 등한시하는 운동만을 아는 운동선수는 아니었다.

조지아 공대 ‘엘로우 자킷’에 입학한 그는 자신의 명성을 더욱 드날렸다. 조지아 공대에 입학한 첫해였던 지난 1992년 그는 유격수로 3할6푼3리의 타율을 거두며 아틀란틱 코스트 컨퍼런스 (Atlantic Coast Conference, 약칭 ACC) ‘올해의 신인상’을 수상하는 큰 기쁨을 누렸다.

또한 그는 팀을 그시즌 가장 많은 도루(25개)를 기록한 대학팀으로 만드는데도 일조했다. 그의 이러한 기록과 대표선수 선발전에서 타율3할3푼3리는 1학년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1992년 스페인 바로셀로나 올림픽 미국국가대표로 참여할 수 있게 했다.

올림픽경기에서 노마는 전 경기 주전으로 나서지는 못했지만 20타석에서 2할의 타율을 기록하며 값진 경험을 했다.

미전역으로 유명해진 1993년 그는 상대팀의 경계대상 1호가 되었고 그해 그는 공격적인 부문에서보다 수비와 베이스 러닝면에서 많은 성장을 보여주었다.

대학생활의 마지막해가 된 1994년, 조지아공대에서의 선수생활중 가장 인상적인 시즌을 보내게 되었다.

그해 그는 타율 4할2푼7리, 16개 홈런을 기록했고 특히 컬리지 월드시리즈 지역예선에서는 탈수증세로 링거를 맞는 최악의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경기에 대타로 출전, 초구 홈런을 뽑아내 팀 승리에 결정적 기여를 하며 그해 모교를 팀역사상 처음으로 컬리지 월드시리즈에 진출시켰다.

조지아공대의 선두타자였던 그는 3년동안의 대학선수생활동안 타율3할 7푼2리, 2루타 58개,3루타 14개, 23개 홈런, 166 타점을 기록했고 35번의 연속 도루 성공이라는 기록도 세웠다.

영광의 1994년 여름을 맞고 있었던 그는 자신에 인생에 있어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그해 그는 메이저리그 드래프트에서 자신을 1라운드 12번째로 지명한 명문 구단 보스톤 레드삭스와 1994년 6월 계약을 맺으며 아마츄어가 아닌 프로선수의 길을 택했다.

그가 처음으로 프로선수생활을 한 것은, 플로리다 스테이트 리그 속의 보스턴 산하 마이너리그 싱글에이 사라소타 레드삭스였다. 그해 그는 28경기에 출전타율 2할9푼5리,홈런1개, 16타점에 에러는 단 3개만 범하는 괜찮은 기량을 선보였다.

다음해 그는 이스턴리그소속 보스턴 산하 더블에이 트렌톤 선더스로 자리를 옮겨 처음으로 한시즌동안을 온전히 마이너리그에서 보냈다.

그해 그는 팀이 치른 128경기에 모두 출전하며 그는 35개의 도루와 77득점, 8개의 3루타와 137안타를 기록하며 최다안타부문 이스턴리그 2위에 올랐고 35개의 도루로 리그 3위를 기록했다. 그의 도루 35개는 트렌톤 선더의 팀 기록이자 보스턴 산하팀들에서는 3번째로 많은 숫자였다.

그해 그는 이스턴리그 산하 올스타선수에 선정되었고 28경기 연속 무실책 경기를 펼쳤으며 시즌내 23개의 에러만을 기록했다.

이듬해 그는 다시 한단계 상승되어 보스톤 산하 트리플 에이 포터켓 레드삭스에서 시즌을 맞았지만 부상으로 4월 15일까지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

4월15일 콜롬부스전부터 경기에 복귀한 그는 3경기에서 홈런 3개를 기록하는 맹타를 휘둘렀지만 부상의 악령은 그를 괴롭혔고 4월19일 다시 부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부상으로 인해 걸프코스트리그 소속 루키팀 걸프코스트에서 5경기를 가졌던 그는 그 이후 다시 포터켓으로 복귀했다. 복귀후 그는 7월15일부터 8월2일까지 15경기 연속안타 행진을 펼치며 맹타를 휘둘러 7월의 보스턴 소속 마이너리그 선수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해 그는 잦은 부상에도 불구하고 포터켓에서 43경기에 유격수로 나서며 타율 3할4푼3리 홈런16개, 3루타 2개, 2루타 15개, 59안타, 46타점 장타율 7할3푼3리를 기록했다. 그의 16개의 홈런은 포터켓 역사상 유격수가 친 가장 많은 홈런이었다.

노마는 1996년 8월 31일 오클랜드 어슬래틱스전에서 경기 후반부 2루수 수비자리에 대신 들어오면서 메이저리그에 데뷔했다. 그 다음날 저녁 그는 첫 메이저리그 안타이자 첫 솔로홈런을 얼마전까지 동료였던 존 와스딘에게서 뺏아내는 등 3개의 안타와 6개의 토탈베이스를 기록하는 인상적인 플레이를 펼쳤다.

그해 그는 21경기에서 유격수로 선발출장해 4개의 홈런과 5번의 도루시도에서 5번 모두를 성공시켰고 그가 선발출장한 경기에서 보스턴 레드삭스는 14승 7패의 좋은 성적을 기록하기도 했다.

1997년 그는 시즌 시작을 처음으로 빅리그에서 맞았다. 풀타임 메이저리거가 된 첫해였던 그해 그는 209안타 98타점 30홈런, 3루타 11개, 타율 3할6리를 기록하는 엄청난 타격을 보여주며 당당히 메이저리그 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그의 209안타와 3루타 11개는 그해 리그 최다기록이었으며 또한 그의 30개의 홈런은 아메리칸리그 신인 유격수가 친 가장 많은 숫자의 홈런기록이기도 했다.

그해 그는 30경기 연속안타 기록행진을 펼쳤고 테드 윌리엄스가 가지고 있던 보스턴 레드삭스 신인선수 토탈베이스와 2루타부문을 97년 9월19일 시카고전에서 경신했다.

또한 그는 1997년 9월27일 그해 7번째 1회초 선두타자 홈런을 기록하며, 조 페스키가 보유하고 있던 보스턴 신인선수 최다안타 기록 205안타에 타이기록을 세웠고, 같은 경기 2회초 2루타로 기록하며 그 기록을 갈아치우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그해 펼쳐진 올스타선수에도 선정되 1975년 프레드 린 이후 첫번째 올스타전에 뽑힌 레드삭스 신인선수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화려한 기록은 그를 시즌 끝난후 아메리칸리그 올해의 신인상에 만장일치로 선정되는 리그역사상 6번째 선수가 되는 영예를 안겨 주었다.

1998년 풀타임 메이저리거로서의 2년째를 맞은 그는 2년차 징크스를 저멀리 날려버리며 한층 성숙된 기량을 펼쳐보였다. 98년 그는 정규시즌 195개의 안타에 35홈런 122타점, 타율 3할2푼3리를 기록하며 팀의 포스트시즌 진출을 도왔고 그해 벌어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의 아메리칸리그 디비전시리즈에서 11타점을 기록하며 리그 디비전시리즈 타점부문 신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그의 맹활약에도 불구하고 팀은 12년만에 처음으로 거둔 포스트시즌에서의 승리에 만족해야만 했고 풀타임 메이저리거가 된후 2년연속 30홈런을 기록한 5번째 선수가 되는등 인상적인 플레이를 펼친 그였지만 그 해 벌어진 아메리칸리그 MVP선정에서는 당시 텍사스 레인저스의 후안 곤잘레스에 이어 2위를 차지하는데 그치고 말았다.

1999년 그는 팀의 간판타자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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