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 ‘호루라기 친구’ 7만 명 키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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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송파구에 사는 직장인 최모(41)씨는 초등 4학년 딸과 학교 폭력 얘기를 나누다 깜짝 놀랐다. “‘왕따’나 친구들이 싸우는 것을 보면 선생님이나 아빠에게 말하라”고 당부하자 딸이 고개를 저은 것이다. 딸은 “선생님이나 엄마·아빠에게 말하면 아이들에게 따돌림당하거나 ‘비겁쟁이’로 낙인찍혀요. 말하기 어려워요”라며 정색을 했다. 최씨는 “아이들 사이에 이런 말 못할 고민이 있는지 전혀 몰랐다”고 말했다.

 학교 폭력은 가해자와 피해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방관하거나 동조하는 또래가 적지 않다. 청소년폭력예방재단의 실태조사(2010년)에 따르면 학교 폭력을 목격한 학생 10명 중 여섯(62%)은 “모른 척했다”고 답했다. 차명호 평택대 교육대학원장은 “상당수 학생이 피해자가 아니라는 안도감에 방관자에 머물거나 피해자가 되지 않으려 따돌림에 가담하는 게 현실”이라고 진단했다.

 근본적인 대책은 또래 문화(Peer Culture)의 변화다. 또래는 교사나 부모보다 먼저 보고, 깊이 듣는다. 한국 청소년 10명 중 절반(51.1%)은 고민을 말하는 상대로 친구를 꼽았다.

본지는 ‘멈춰 폭력! 호루라기 친구’ 7만 명을 만들자고 제안한다. 전국 초·중·고 재학생 700만 명 중 1%를 또래들의 폭력 상담자·도우미로 활용하자는 취지다. ‘호루라기 친구’는 폭력을 보면 제지하고, 다투는 친구 사이에 대화를 잇고, 외로운 또래의 고민을 듣는 역할을 한다. 강영진 성균관대 갈등해결연구센터장은 “또래는 간단한 훈련을 받고도 어른이 개입하기 힘든 문제를 해결한다”고 지적했다.

 미국에선 이런 ‘또래 조정(Peer Mediation)’이 활발하다. 한국에도 비슷한 움직임이 있다. 경기교육청은 지난해 학교 10곳에 ‘또래 조정인’을 도입했다. 갈등 조정법과 상담 기법을 익힌 또래가 중재자로 나선다. 이들이 해결한 사례가 학교별로 10여 건에 이른다. 청소년 상담원과 지자체·학교와 연계한 ‘또래 상담자’ 제도도 보급 중이다. 고민 많은 또래에 다가가 벗이 되는 청소년을 키운다. 경기도 고양시의 행신고는 교칙을 어긴 학생의 징계 여부와 수위를 학생 스스로 결정하는 자치 법정을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미흡하다. 활동 중인 또래 상담자는 5000여 명에 그친다. 전국 학생 수(700만 명)에 비해 턱없이 적은 숫자다. 조은경 청소년상담원 팀장은 “학급에 또래 상담자가 4명 이상일 때 좋은 효과를 거둔다”며 “정부·지자체·학교가 적극 지원 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호루라기 친구=청소년 10명 중 6명은 폭력을 보고도 모른 척한다. 어른에게 실태를 잘 알리지도 않는다. 폭력을 보면 ‘멈춰’라고 외치고, 괴롭힘당하는 친구를 위로해주며, 폭력 실태를 외부에 알려주는 학생들이 있어야 학교 폭력을 근절할 수 있다. 중앙일보는 이런 청소년들을 ‘호루라기 친구’로 이름 지었다. 전문가들은 ‘호루라기 친구’가 많아지면 가해 학생들이 위축돼 학교 폭력이 줄어든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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