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Novel] 김종록 연재소설 - 붓다의 십자가 3.칼을 베어버린 꽃잎 (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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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용규

이튿날 아침, 최항이 등청하자 지양은 나전칠기 옷장을 열었다. 잡화점 대식국 사내가 전해준 약제 상자에는 여러 가지 차와 향, 정력제 따위가 들어 있었다. 지양은 그 가운데서 한지로 겹겹이 싼 약제를 골라 펼쳤다. 밀가루가 발라진 밤톨만 한 크기의 약 덩어리가 나왔다. 그 약에 손가락이 닿지 않게끔 칼날로 조심스레 밀가루를 걷어냈다. 갱엿처럼 보였다. 지양은 칼끝으로 한 조각을 떼어내 분합에 넣고는 남은 약 덩어리를 도로 쌌다. 환약으로 된 정력제도 몇 줌 덜어내 찻종지에 담았다. 약제 상자를 보자기로 묶은 다음 옷장 깊숙이 넣고 자물쇠를 채웠다.

 분합에 넣어둔 약 조각을 더 잘게 쪼개 깨알 크기로 만들었다. 그 분합을 다기(茶器)들 틈에 놓았다. 연근과 연잎을 차로 우려낼 때 아주 조금씩 섞어 쓸 거였다.

 부엌으로 나온 지양은 아랫것들에게 숯불을 피우라고 일렀다. 약탕기에 환약을 넣고 물을 부어 끓였다. 수저로 으깨고 젓자 곧 걸쭉한 상태로 풀어졌다. 조금 더 끓이자 묵처럼 변했다. 은제 수반에 옮겨 꿀을 섞었다. 끈적끈적한 점성이 생겼다. 손으로 비벼서 길쭉한 작두콩 크기로 빚었다. 밀가루를 묻혀 서로 달라붙지 않게 한 다음 그늘에 널어 말렸다.

낙성식 날이 밝았다. 황제와 태자가 친히 거둥했다. 강도의 문무 대신과 고승 대덕들은 물론이고 고려 오도양계(五道兩界:서해도·교주도·양광도·전라도·경상도, 북계·동계)의 수령들과 지방관들이 거의 다 참석했다. 그야말로 떡 벌어진 낙성식이었다.

 “궁궐보다 두 배는 더 큰 것 같구나.”

 태자가 가마를 뒤따르는 내시들에게 한 말이었다. 태자의 그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지주사 최항과 집정 최이의 맞붙은 저택은 그 규모가 궁궐에 필적했다. 조경이 잘된 원림과 격구장까지 합치면 넓이가 궁궐의 배는 족히 되었다.

 “줄을 대려고 몰려든 관리들이 황제 폐하보다 집정 부자를 더 우러릅니다.”

 “실권자들이니까.”

 내시에게 대꾸하는 태자의 눈빛은 쓸쓸했다. 정방 소속 문인 유경이 태자 곁을 지나다가 예를 갖췄다. 태자는 최항의 심복이 된 그에게 가벼운 눈인사만 했다. 전전승지 김준과도 마주쳤다. 태자는 유경에게 했던 것과 달리 김준에게는 살갑게 답례했다. 김준이 최이 집정의 하수인이라는 건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껄끄러운 관계일수록 예를 더 갖춰야 한다는 게 난세를 건너는 태자의 처세술이었다.

 이윽고 태자의 가마가 차일이 쳐진 낙성식 마당에 다다랐다. 손님들을 맞던 집정과 지주사가 다가와 자리를 안내했다. 태자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황제의 왼편에 앉았다. 최항 지주사 바로 옆자리였다. 최이 집정 자리는 황제의 오른쪽 자리였다. 대신들 몇몇과 판각 불사를 주관하고 있는 선원사 주지 진명 국사, 수기 도승통이 와서 머리를 숙였을 뿐 지방에서 올라온 수령들은 태자에게 감히 얼굴과 이름 석 자를 내밀지 못했다. 집정 부자의 눈치를 보고 선을 대야지 안 그랬다가는 찍히고 말았다. 벽제 소리가 마당을 넘어왔다. 황제의 초요련이 도착했다. 낙성식장에 아악이 연주되기 시작했다. 궁중에서 악사들까지 불려 나왔던 것이다. 태자와 집정 부자, 만조백관이 자리에서 일어나 수레에서 내리는 황제를 맞았다.

 재주를 다 쓰지 않고 남겼다가 조물주에게 돌려주고, 녹봉을 다 쓰지 않고 남겼다가 조정에 돌려주고, 재물을 다 쓰지 않고 남겼다가 백성에게 돌려주고, 복을 다 쓰지 않고 남겼다가 자손에게 돌려줘라.

 낙성식 연회가 끝날 때까지 태자가 곱씹은 구절이다. 북송 진종 황제 때 왕참정이 쓴 사유명(四留銘:마음에 새기는 네 가지)이었다. 참정은 종2품 참지정사로 재상의 직위에 해당했다.

 없는 재주까지 다 끌어 써서 조물주를 비웃고, 녹봉의 수십 배를 착복해서 조정을 거덜 내고, 재물을 긁어모아서 백성을 헐벗게 만들고, 복에 겨워 꺼릴 게 없는 이들 최씨 가문. 아버지는 집정이 되어 나랏일의 전권을 행사한다. 큰아들은 불교계를 쥐락펴락하고 작은아들은 예비 집정 수순을 밟고 있다. 그 밑으로 차례를 기다리는 손자가 버티고 있다. 삼대에 걸친 처첩들의 수는 셀 수가 없을 지경이다. 하늘의 이법이 작동하고 부처님 법이 살아 있다면 이들이 언제까지고 이렇게 흥청망청 누릴 수는 없으리라.

 화분에 심어놓으면 못된 풀도 화초라 한다. 떡 벌어지게 구색을 갖추고 기품 있는 행세를 하지만 본색은 똥자루보다 못한 악의 꽃이다. 그 꽃은 얼핏 화려하고 향기는 진하다. 하지만 꽃이 지고 열매를 맺게 되면 추악한 본질이 드러나게 돼 있다. 불경에 일렀던가. 악의 열매가 익기 전에는 악한 사람도 복을 만난다. 악의 열매가 익은 뒤에는 악한 사람은 죄를 받는다. 선의 열매가 익기 전에는 착한 사람도 화를 만난다. 선의 열매가 익은 뒤에는 착한 사람은 복을 받는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부처가 틀렸다. 세상을 잘못 본 것이다.

 나는 종교를 경전에서 말하는 그대로 믿는 순진한 사람이 아니다. 대체로 무지렁이들은 종교를 사실로 받아들인다. 현명한 이들은 웃음거리로 여기게 마련이고 통치자들은 적당히 이용하기 좋은 세력으로 받아들인다. 나는 부왕의 뒤를 이어야 하는 예비 통치자다. 현실정치에 도움이 되도록 종교를 활용할 필요가 있다. 내가 알기로 최이 집정이야말로 불교를 기가 막히게 이용하는 권력자다. 내가 배워야 할 미덕이다.

 앞으로 십 년! 그 안에 부처님 법이 작동하기를 바란다. 아니 그 안에 이들, 악의 꽃 세력을 뿌리 뽑도록 하자. 아내 김씨의 외할아버지가 되는 집정, 외삼촌이 되는 최항이지만 사사로이 혈연을 따질 계제가 아니다.

 잔칫상을 받는 둥 마는 둥 하고 최항의 집에서 나온 태자는 궁궐에 들어가 미복 차림으로 나왔다. 아우 창 왕자와 내시 하나만을 대동하고서였다. 그들 또한 평민 복장을 했다. 셋은 따로따로 궁에서 걸어 나와 격구장 앞에서 만났다. 우장도 갖추지 않았는데 갑자기 장대비가 쏟아졌다. 셋은 비를 흠뻑 맞으며 남문 쪽으로 잰걸음을 했다. 아연실색하게도 그들이 들어간 곳은 유경의 집이었다. 유경은 최항의 심복으로 무인정권 인사행정 기구인 정당의 실세가 아니던가.

 “고뿔 들겠습니다. 어서 옷부터 갈아입으소서.”

 대기하고 서 있던 유경이 태자와 왕자에게 수건을 건네며 사랑채로 안내한다.

 “하늘이 이렇게 우릴 돕는구려.”

 태자는 모처럼 환하게 웃었다. 유경이 뜨악한 표정을 짓는다.

 “감시하는 밀정들 눈을 따돌릴 수 있잖소이까.”

 왕자가 따라 웃으며 말한다. 유경이 좁은 마당 너머 대문 쪽을 쳐다본다. 빗줄기만 요란할 뿐 쥐새끼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는다. 미리 와 있던 외척 유 좌상시, 부사가 태자와 왕자가 삼베 철릭 벗는 걸 도와준다. 철릭은 빗물에 젖어서 몸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태자와 왕자는 유경이 꺼내온 허름한 철릭으로 갈아입고 아랫방으로 내려온다. 낯선 서방의 문사 둘이 머리를 숙이고 서 있었다.

 “자, 어서 앉읍시다.”

 태자는 옹색한 방에서 그들과 무릎을 맞대고 앉았다. 그들은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유경의 사랑채에서 머리를 맞댔다. 비는 그때까지도 줄기차게 내렸다.

“내 혹시나 해서 너를 예의 주시해 왔느니. 왜 이런 게 너의 나전칠기 장 속에 들어 있는 게냐?”

 최이가 지양을 불러다놓고 겁박했다. 궁궐 상약국 상늙은이 봉의(奉醫)가 불려와 무릎을 꿇고 있는 가운데 약제 상자가 펼쳐져 있었다. 지양이 장 깊숙이 넣고 잠가두었던 것이었다. 언제 이 약제 상자를 꺼내와 검사까지 마친 걸까. 방금 불려 나올 때까지도 나전칠기 장에는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지양은 최이 집정의 정보력과 일처리의 기민함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왜 대답을 못 하지? 이 맹독성 약으로 누굴 죽일 셈이었느냐!”

 최이는 푸르죽죽한 얼굴을 사납게 일그러뜨리며 침을 튀겼다.

 “아버님, 진정하셔요. 불제자인 비구니가 누굴 해치겠사옵니까?”

 지양은 담담하게 합장했다.

 “허면 왜 이런 걸 구해서 숨겨두고 있지?”

 “숨겨둔 게 아니라 깊숙이 갈무리해두고 있었던 거랍니다.”

 “대체 왜 이런 독극물을 지니고 있느냔 말이다.”

 “아버님, 그 약은 제가 먹는 것이에요. 생활이 바뀌면서 지독한 변비가 생겼거든요. 극미량으로 설사를 일으키는 효과가 있답니다.”

 “변비약으로 독을 써?”

 최이는 봉의와 눈을 맞추었다가 다시 지양을 노려본다.

 “이독제독(以毒制毒)이라는 거지요. 천축국에서 들여온 명약이에요. 향료와 차는 지주사 나리와 제가 쓰는 것이고 이 환약은 아버님 약으로 아주 어렵게 지어온 특별한 정력제이옵니다.”

 “특별한 정력제?”

 최이는 의심쩍어 하면서도 관심을 보였다.

 “아버님은 그동안 정력제용 탕약을 너무 많이 드셨사옵니다. 과로에 과음까지 겹쳐 간에 심한 부담을 주었지요. 그래서 병이 깊어지신 거랍니다. 무엇보다 간이 편안해야 안색도 좋아지고 몸이 가뿐해지십니다.”

 지양은 막힘 없이 아뢴다. 최이는 봉의에게 확인한다. 봉의는 지양의 말이 옳다고 확인해주었다.

 “그런데 왜 여태까지 이 환약을 내게 전해주지 않은 것이냐? 네가 잡화점에서 이 약제 상자를 가져온 건 그끄저께가 아니었던고?”

 귀신은 속여도 이 늙은이는 속일 수 없다는 듯이 최이가 정확히 되짚었다. 너의 일거수일투족이 내 손바닥 안에서 노닐고 있다는 뜻이었다. 지양은 전혀 놀라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응당 밀정을 시켜서 자신의 뒤를 밟고 있으려니 했던 일이었다. 더 뒤를 밟지 못하게끔 이런 통과의례는 한 번쯤 꼭 필요했다.

 “이 역시 탁월한 정력제이긴 하오나….”

 “하오나?”

 “간에 부담을 주는 건 마찬가지지요.”

 “그런 걸 왜 주문해 왔다는 게냐?”

 “궁하면 통한다고 묘안이 떠올랐답니다.”

 지양이 밝게 웃었다. 활짝 핀 백련이 향기를 뿜는 것처럼 방안이 환해졌다. 최이는 속으로 민망한 생각을 품었다. 천하의 절색이 바로 이 아이로구나. 아들 놈 첩만 아니라면 칼부림을 해서라도 빼앗고 싶은 미색이었다.

 “어, 어떤 묘안?”

 지양의 화사한 볼과 입술에 빠져 있던 최이가 말을 더듬었다.

 “밖에 언년이 있느냐?”

 얼굴이 얽둑얽둑한 여종이 대발 너머에서 예, 하고 소리한다.

 “엊그제부터 말려두었던 아버님 좌약을 냉큼 가지고 오너라.”

 지양은 이런 불상사를 예상했던 사람처럼 차근차근 일을 진행시켰다. 최이는 늙고 병든 자신의 신세가 한탄스러웠다. 이 아이보다는 못하더라도 열 명이 넘는 첩들 가운데 미색은 많았다. 그 미색들에게 독수공방살이를 시켰다. 양기가 급속도로 쇠해져버렸기 때문이다. 탕약을 먹으면 양기가 조금 살아났지만 몸이 붓고 몸살이 나버렸다. 하룻밤 즐기자고 저승 문턱을 달려 넘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여종이 약을 대령했다. 길쭉한 약들이 수십 알이나 되었다. 지양은 그중 하나를 집어서 절반을 잘라 깨물어 먹어 보이며 나머지 절반을 봉의 영감에게 건넸다. 앞니가 다 빠져버린 봉의 영감은 지양이 약을 꿀꺽 삼키는 걸 보고서야 비로소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신중히 음미하더니 품평을 한다.

 “최상품 약제로 고아 만든 거로군요, 영공.”

 “이걸 깨물어 먹을 수도 없고 어떡하라는 말이냐?”

 “아버님, 이건 제가 생각해낸 건데요.”

 “답답하구나. 어서 그 묘안이라는 걸 말해보라.”

 천하의 최이가 이처럼 안달하는 모습이 우스웠다. 지양은 낯을 붉히며 주저한다.

 “뭐냐니깐 그런다!”

 “외람되오나 여쭙겠나이다.”

 “……?”

 “대변을 언제 보시는지요?”

 “그런 건 왜 물어. 아침에 본다.”

 “그럼 밑을 닦으시고 나서 이 좌약 한 알을 항문에 밀어 넣어보셔요. 다음 날 새벽까지 하루 동안 직장에서 녹아 약성이 흡수될 것이옵니다. 그렇게 되면 간에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양기를 돋울 수 있을 걸로 사려되옵니다.”

 “어떤가, 봉의 생각은?”

 최이가 좌약 한 알을 들어 보이며 묻는다.

 “놀라운 발상이옵니다. 소생은 그런 묘안이 있을 줄 꿈에도 몰랐나이다.”

 봉의 영감이 눈을 크게 뜨며 고했다.

 “흐흠! 모양새가 좀 사납지만 지금 당장 넣어보지 뭘. 너의 깊은 효심 잘 알았으니 이 약제 상자 가지고 그만 가보거라. 내가 널 괜히 의심했느니.”

 지양이 물러나오자 최이는 봉의 영감 앞에서 엉덩이를 까고 좌약을 넣는 것이었다.

 “이녁도 하나 넣어보게나.”

 약이 아까웠지만 효과를 같이 시험해보자는 셈으로 한 알을 건네준다. 봉의 영감은 좌약을 챙겨서 괴춤에 넣으려고 했다.

 “허허, 딱하긴. 같이 넣어봐야 효과를 입증할 거 아니오.”

 최이의 채근에 봉의 영감도 허리끈을 풀고 엉거주춤 앉아서 하초에 좌약을 넣는다. 뜰에서 가만가만 발걸음을 옮기던 지양의 입가로 미소가 흐른다.

글=소설가 김종록
일러스트=이용규 buc024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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