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위크]대만인 남편과 중국인 아내의 갈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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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을 깨뜨리는 불화의 사연을 소개한다. 전직 경찰관인 건장한 체구의 아버지(67)
는 장제스(蔣介石)
의 국민당이 대만으로 퇴각하던 1949년 대만에 건너 왔다. 그는 다른 본토인들처럼 대만 여자와 결혼해 자녀 넷을 낳았다. 3년 전 아내가 암으로 죽자 그는 중국 북부 빈농 출신의 한 여자(39)
를 소개받아 두번째 아내로 삼았다. 그러나 반공교육을 받고 자란 자식들은 그 결합에 반대했다. 나이가 계모와 비슷한 딸(37)
은 “그 여자는 오직 생활수준을 올려보자는 생각뿐”이라고 말했다. 한 아들은 상속권 문제로 다투다가 아버지 아파트의 유리창을 깼다. 그는 아버지에게 “본토인들은 오직 돈만 노리는 것”이라고 소리질렀다.

대만인과 중국인들 간의 뿌리 깊은 편견을 결혼만큼 여실히 보여주는 것도 없다. 대만은 그동안 양안 간의 결혼에 대한 규제를 점진적으로 완화해 왔고, 최근 몇 년 사이에 그같은 결혼은 급증했다. 많은 중·장년층 대만 남성이 신부감을 찾아 본토의 고향에 갔다 온다. 대만의 대륙위원회는 중국인 부인의 연간 쿼터를 6백 명에서 3천6백 명으로 단계적으로 상향조정했다. 현재 4만3천 명 이상의 중국인 여성이 결혼해 대만에서 살고 있다.

개중에는 행복한 결혼생활을 영위하는 이도 있지만 나이차와 사회적 갈등에서 비롯된 가정문제로 고통받는 이도 많다. 관계가 원만한 경우에도 대만 당국은 문화적·정치적 이유에서 양안 간의 결혼을 회의적으로 본다. 중국 여성은 결혼허가를 얻은 뒤에도 영주권을 얻으려면 족히 10년은 기다려야 한다. 그런 여성이 3만 명이나 밀려 있기 때문이다. 부모가 본토 출신인 입법의원 판웨이강(潘維剛)
은 “사람들은 그들의 언어도 이상하게 여긴다”고 말했다. 예컨대 본토인들은 남편을 ‘아이런’(愛人)
이라고 부르는데 대만에서 그 말은 정부(情夫)
를 가리킨다.

이런 냉소적인 반응에는 다 이유가 있다. 생활수준이 비교적 높은 중국 해안지방 출신 여성들은 호의호식을 기대하며 대만에 왔다가 막상 연금에 의지해 사는 남편의 처지에 환멸을 느낀다. 중매인들은 남자들에게 신부감을 소개하는 대가로 선물이나 돈을 요구한다. 경찰은 위장결혼으로 대만에 입국한 후 포주와 달아나는 수법을 쓰는 중국인 윤락조직 몇 개를 적발했다. 경찰은 주로 퇴직 공무원이나 군 출신인 대만인 남편들이 위장결혼의 대가로 일정액을 챙긴다는 것을 알아냈다. 최근 한 청문회에서 민진당의 정차오밍(鄭朝明)
의원은 “많은 본토 여성이 딴 속셈을 갖고 대만에 온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가장 기회주의적인 사람은 대체로 대만인 남성들이다. 중국에서 일하는 상당수 대만 사업가들은 현지처를 두는 것을 투자의 일종으로 생각한다. 대만인들의 공장이 운집해 있는 해안지방 곳곳에는 ‘첩촌’이 흩어져 있다. 대만에 처자를 둔 중년의 한 공장 관리자는 “본토에는 미녀가 많다. 한 달에 2백∼3백 달러만 주면 여자를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일부 대만 기업들은 고위 관리자들이 현지여성과 장기간 혼외관계를 갖지 못하도록 말린다. 한 공장 관리자는 “본국의 부인들이 사실을 알게 되면 난리가 날 것”이라고 말했다.

향수 때문에 새 신부를 찾는 사람도 있다. 거의 반세기 동안 고향땅을 밟아보지 못한 나이 든 대만인들에게 젊은 신부를 찾아 떠나는 귀향길은 더할나위 없는 감회를 일으킨다. 퇴역군인의 경우는 특히 그렇다. 그런가 하면 단순히 여러 여자를 전전하는 남자도 있다. 육군 대령으로 퇴역한 창페이타오(80)
는 이달 다섯번째 부인감을 찾아 고향인 칭다오(靑島)
市로 떠났다. 동향인 현 부인 리구이후아(63)
와는 이혼할 계획이다. 7년 전 남편을 소개받았다는 그 여인은 “여태까지 같이 살아놓고 이제 와서 내가 예쁘지 않다느니 피부가 돼지 살갗 같다느니 불평한다”고 하소연했다.

창페이타오는 60년 전 칭다오에서 첫 결혼을 했다. 그러나 곧 국민당이 대만으로 퇴각하면서 첫 아내와 헤어졌다. 그가 28세가 됐을 때 정부는 본토 출신 군인들의 재혼을 허락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그는 대만 여자와 재혼했다. 양안의 왕래가 자유로워지자 그는 그녀와 이혼하고 93년 53세의 칭다오 출신 여성과 세번째 결혼을 했다. 그러나 역시 만족하지 못하고 3개월만에 이혼했다. 그러자 중국인 친구들이 신부감 대여섯 명을 소개했다.

그는 그중에서 리구이후아를 선택했다. 그가 결혼조건으로 원하는 것을 묻자 그녀는 작은 집과 돈·보석을 요구했다. 그는 전부인을 수소문해 결혼선물로 줬던 현금 6천 달러를 빼앗아 그중 4천 달러를 새 신부에게 줬다. 그로부터 7년이 흐른 지금 상황은 또다시 바뀌었다. 최근 그는 본토에서 좀더 젊은 새 아내를 구하겠다며 리구이후아에게 도움을 청했다.

본토 출신 부인들은 입법의원과 사회사업가들의 도움으로 권익투쟁을 벌이고 있다. 그들은 사회적 오명을 감수해야 할 뿐 아니라 일할 기회도 얻지 못하고 있다. 근년에 일부 중국인 부인들은 거리로 나가 비자 정책의 완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여 왔다. 潘의원은 본토 출신 신부들에게 안내책자를 배포한다. 거기가 출발점이다. 반세기의 반목을 봉합하기란 결혼에서도 쉬운 일이 아니다.(Mahlon Meyer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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