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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덕단지의 힘

중앙일보

입력

8월2일 오전 한국과학기술원내 에너지·환경 연구센터 2층 세미나실. 물에 관한한 한·미 최고수들이 만났다.

3시간에 걸친 진지한 토론 끝에 두 사람은 손을 잡았다. 미국내 최고 수처리 전문가로 인정되는 제럴드 구터(바신 워터 테크놀로지 그룹 부사장) 박사는 환경전문 벤처기업인 일류기술 남승엽씨의 손을 꼭 잡고 훌륭하다(Great!)를 연발했다.

첨단제조 벤처기업들의 둥지인 대덕밸리가 꿈틀거리고 있다. 1990년대 중반에 뿌려진 씨앗들이 이제 하나둘씩 과실을 맺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 테헤란밸리가 반짝하다가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이는 것과는 자못 대조적이다.

일류기술이란 회사는 국내에서 수(水)처리에 관한한 최고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6월 과학기술부는 이 회사를 해당 분야 국내 최고로 인정하는 국가지정연구실(NRL)로 선정했다.

국가차원에서 전략적으로 육성하는 핵심기술분야의 국가우수 연구실로 지정되면 5년간 최고 매년 3억원의 연구비가 지급되고, 대외적으로 국내 최고라는 명예와 함께 각종 사업에서도 가점(加點)을 받는다. 물론 심사도 까다로워 논문·특허 등의 연구실적과 연구자들의 개인 이력 등 세세한 부분이 체크대상이다.

그런 만큼 지정된 곳을 보면 모두가 대단하다. 오랫동안 한 분야를 파 온 정부 출연연구소나 대학 및 대규모 투자가 가능한 대기업 연구소 등이 대부분이다. 자금난·인력난·정보난 등 3중고를 겪어야 하는 벤처기업으로서는 국가지정연구실로 선정되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어렵게 여겨진다. 이러한 난관을 뚫고 일류기술은 창업 2년 만에 국가지정연구실로 선정됐다. 매출은 4천만원에 불과하면서 지난 2년간 28억원에 달하는 연구비를 투자한 결과이다. 이 기간중 남승엽 사장은 집 팔고 대전시 변두리의 1천만원짜리 전세로 옮겼으며 연구비가 제때 조달되지 않아 속이 숯검댕이가 된 것도 한두 차례가 아니었다.

서울 법대 출신이면서 KAIST 출신의 석·박사를 이끌고 있는 남사장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며 “세계 최고의 수(水)처리 회사가 돼 국내 환경 기술을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리는데 일조하겠다”고 밝혔다.

일류기술이 입주해 있는 에너지·환경 연구센터. 이곳은 대덕밸리 기업들의 잠재력을 보여 주는 살아 있는 사례중 하나일 뿐이다. 현재 건국산업·엔바이온·나노포커스·남성에너지·태현산업·비에스켑·이노테크케미칼·카보텍·텔레포스·GSI·한켐 등의 회사가 옹기종기 모여 각기 10여평의 공간을 차지하고 처녀지를 개척하고 있다.

평당 월 2만원의 임대료에 관리비를 제외하고는 들어갈 것이 없어 초기 벤처기업들로서는 기반구축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장소이다. 이미 일부 기업은 홀로 서기에 성공했다.

일류기술 앞집에 입주했다가 창업보육센터를 졸업하고 차로 10분 떨어진 엑스포 과학공원내 대전시 엑스포 벤처 종합영상관에 둥지를 틀은 인터시스. 사무실 공간이 80여평으로 대폭 늘었다. 93년 엑스포 당시의 본부 건물은 사무 공간으로 쓰기에는 더할 나위 없다. 녹지에 둘러싸인 환경에 첨단을 자랑하는 이 건물의 평당 임대료는 전기값·통신비를 포함해 1만2천원. 평당 4백만원이 넘는 서울의 테헤란밸리에 비하면 엄청난 혜택이다.

인터시스의 장기는 과학·공학자용 소프트웨어. 출시를 앞두고 있는 회심작인 인터디엠은 인공위성에서 받은 2차원 정보를 3차원 영상으로 재현시켜 마치 비행기를 타고 저공비행을 하며 지형을 살피는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 도로 건설과 항공 시뮬레이션, 도시개발계획 등에 쓰이는 등 다양한 용도를 갖고 있다. 이에 앞서 과학·공학자용 전문 소프트웨어인 VIP는 지난해 10월 미국에 10년간 2천2백만 달러의 기술료를 받고 수출했다. 수입처인 RSI사는 미국내 유수한 소프트웨어 회사로 인터시스는 과거 이 회사의 한국 판매처인 을(乙)이었다가 갑(甲)으로 입지가 1백80도 바뀌었다. 윤종식 사장은 대덕밸리는 우수한 인재들의 집합지인데다가 사회 기반시설이 우수해 경쟁력이 있다며 세계와 겨룰 최상의 교두보라고 밝혔다.

8월 3일 자정 -. 대전 4공단내 벤처빌딩 다산관 2층 IT사. 복도에 놓인 임시 탁자에서 10여명의 직원들이 초고속통신망에 쓰이는 보드를 손질하고 있었다. 주문품이 급작스럽게 밀려들며 일손이 없어 야근을 하고 있던 것. 인근 식당에서 배달된 야식을 먹으며 공비호 사장은 일하는 것을 보면 완전히 굴뚝 벤처라며 저 중에는 박사 공원도 두 명이나 있다고 우스갯소리를 던진다.

일반인에게는 생소한 광통신분할장치(WDM)를 만드는 IT는 대덕밸리에서도 잘 나가는 회사에 속한다. WDM이란 빛의 굴절을 달리해 머리카락보다 가는 선에서 보다 많은 양의 정보를 보내는 장비. 대기업에서도 못만드는 80Gbps급 대용량 고밀도파장분할 다중화 장비(DWDM)를 만들어 출시를 눈앞에 두고 있다. 용량면에서는 국내 최대이고 외국의 유명회사와도 뒤지지 않는다는 평가이다.

IT도 KAIST 창업보육센터 출신으로 일류기술 옆방에 있다가 올초 보육센터를 졸업하면서 대전시가 지은 벤처빌딩에 입주했다.

95년 창업이래 완만한 상승세를 그려오다가 올해 들어 생산에 본격 돌입하면서 폭발적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직원들이 올초 12명에서 8월 현재 42명으로 대폭 늘었다. 매출은 지난해 78억원에서 올 상반기 1백20억원, 하반기까지 3백50억원대는 무난하리란 전망이다. 목표액이 도달될 경우 전년 대비 성장률 4백50%란 무서운 벤처가 탄생하는 셈이다.

한 뿌리에서 나와 각기 성장가도를 달리고 있는 일류기술·인터시스·IT 세 기업은 대덕밸리 기업들의 가능성을 그대로 보여 주는 회사들이다. 첨단 기술을 기반에 두고 세계적 경쟁력을 갖고 있으며 제조위주란 점이 대덕밸리 기업들의 공통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수한 인재를 비교적 쉽게 확보할 수 있다는 게 대덕밸리가 주목받는 가장 큰 이유이다.

대덕밸리 소재 기업의 기술·제조 강점은 대덕연구단지란 집안 배경이 크게 영향을 미친다. 27년여간 30조원 가까운 자양분이 연구단지에 부어졌고, 한국과학기술원과 외국 유학을 마친 우수한 인재들이 밤을 새워 가며 밭을 갈았다. 뿌려진 씨앗들도 학교와 연구소에서 제대로 트레이닝을 받고 사업적 타당성까지 검토받은 우량종. 그러면서도 빨리 싹트고 과실을 맺는 조생종이 아니다. 실험실 기술이 상품으로 바뀌는 마지막 진통을 겪고 이제야 꽃을 피우려 하고 있다.

대덕밸리의 우수성은 연구원 창업회사로 구성된 대덕 21세기 회원사 70개 가운데 IMF구제금융 체제하에서 불과 5%의 기업만이 부도를 맞았을 뿐이라는 점과 벤처기업들의 전반적인 자금난 속에서도 이곳 기업들은 비교적 좋은 조건으로 투자를 유치하고 있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대덕밸리 벤처기업들의 정확한 숫자를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창업도 활발하다.

대덕밸리 기업들의 한계와 단점도 많이 지적된다. 기술력은 좋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경영·마케팅 능력이 없다, 실험실 기술과 사업화 기술은 땅과 하늘의 차이이나 대덕에서는 실험실 기술이 더 큰 소리 친다, 기술자들의 독선으로 주변과 협조할 줄 모른다, 매출보다 빚이 더 많다, 꿈은 장밋빛이지만 실적은 아직 붉은 빛이다.

최근 전자통신과 생명공학 분야가 각광을 받으며 10년 이상 연구하던 베테랑 연구원들이 대거 빠져나간 한국전자통신연구원과 생명공학연구소는 연구 기능이 위협받고 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하지만 서울의 닷컴 기업이 흔들리며 벤처기업 전체에 대한 위기론이 확산되는 지금 대덕밸리의 벤처기업들이 금명간 한국경제의 확실한 주전투수가 될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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