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 된다고 모두 햄버거 먹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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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는 세계시장의 개척을 통해 모든 나라의 생산과 소비를 범세계적으로 형성했다.
뿌리깊은 옛 민족산업들이 파괴되고 있고, 지역과 민족의 낡은 자족성 대신 민족들간의 다방면에 걸친 상호의존이 자리를 잡고 있다. "

유럽 학계 지구화 논쟁의 핵심인사인 〈지구화의 길〉 의 저자 울리히 벡. 뮌헨대 사회학연구소장인 그는 이번 번역서 한 대목에서 공산당 선언의 한 구절을 짐짓 환기시킨다.

그리고는 이를 신자유주의 선언으로 착각지 말라고 농담을 던진다. 그러고 보니 희한하다.
마르크시즘과 신자유주의가 이념 편차와 상관없이 기본 가정에서 너무 닮은 꼴이 아닌가.

민족국가의 국경을 뛰어넘는 자본의 위력(요즘 용어로는 지구화 현상)에 대한 주목이 1백50년 전 일찌감치 시작됐다는 점도 눈여겨 볼 만하다.

〈지구화의 길〉은 몇년 전 가장 뜨거운 현안으로 등장했다가 지금은 약보합세를 유지하고 있는 세계화 논쟁의 한 축을 담당하는 핵심서적. 서유럽에서의 영향력과 달리 국내에는 다소 늦게 알려진 울리히 벡은 최근 몇 년 새 〈정치의 재발견〉〈아름답고 새로운 노동세계〉등 그의 연구서 소개와 함께 조명받기 시작한 특급 이론가.

기본적으로는 앤서니 기든스, 위르겐, 하버마스 등과 같은 진영에 속한다.

한마디로 이들의 입장은 신자유주의 이념의 뻔뻔함과는 분명 구분된다. 그렇다고 '지구화〓맥도널드화' 를 우려하는 잔뜩 움츠러든 방어적 노선과도 다르며, 따라서 '모더니즘은 종쳤다' 고 선언하며 허공중으로 치닫는 탈(脫)근대론자들의 해체주의도 아니다.

서양 모더니즘의 적자(嫡子)격인 울리히 벡과 하버마스 등은 '이것도 아니고, 아닌 것도 아닌' , 이런 회색지대에 선다. 그 때문에 화끈하지는 않지만, 풍부한 성찰은 무시 못한다.

울리히 벡은 지구화(저자는 책에서 세계화 대신 지구화라는 말을 쓴다)는 근대적 성취의 한계를 넘어서서 또 다른 성취를 가져올 수 있는 역사적 찬스라는 입장을 취한다. 한마디로 지난 3백년의 모더니즘이 제1근대화 기간이었다면, 지구화 현상과 함께 앞으로는 제2의 근대화가 펼쳐진다는 것이다.

비유컨대 반환점을 도는 마라토너 같은 것이 제2근대화인데, 근대의 한계를 넘어서는 큰 작업이다. 반환점을 도는 이유는 자명하다.제1근대화가 가져온 생태파괴, 국민국가의 무력화, 초국민적 기업군의 등장, 정보화의 물결, '국민국가의 생활양식을 넘어선 새로운 삶의 방식' 의 등장 때문이다.

따라서 지구화와 함께 다가온 제2근대를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은 일단은 긍정적이다.

물론 낙관주의와는 구분된다. '전지구적 문화의 등장' 은 단순한 자본논리에 따라 자본.권력.정보.지식의 일방적인 쏠림 현상이 오는 단선적인 움직임과 반대로, 탈(脫)중심화와 새로운 지역적 공동체의 영향력도 동시에 자라난다는 것이다.

"미래상을 그려보면서 우리는 왜 일면적인 앞날의 이미지만을 선택하는가. 있을 수 있는 미래 중에서 왜 이러한 측면만을 강조하는가 하고 묻지 않을 수 없다. "

울리히 벡은 이렇게 물으면서 인도 캘커타와 싱가포르에서 미국 TV 드라마 '댈러스' 를 시청하고, 이탈리아 어린이들도 디즈니 캐릭터를 갖고 노는 것을 상정하는 지구촌 맥도널드화 식의 주장은 지나치다고 지적한다.

대신 지구화와 함께 전개된 제2근대화는 '역사적으로 새로운 질의 지구사회' 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고 가늠한다. 울리히 벡의 확신은 고전적 사회사상가들인 에밀 뒤르켐, 막스 베버 등의 국민국가주의적 이론 모델이 지구화.세계화의 모델과는 맞지 않는다는 선언으로 연결된다.

대신 그는 '큰 정치의 시대가 열린다' 는 니체를 인용한다. '큰 정치' 란 물리적인 크기가 아니고, 기존 국가정치권의 '음모 수준의 정치' 를 대신하는 NGO 등의 약진을 말한다.

결론을 내자. 울리히 벡의 지구화 이론은 한국의 독자들에게는 어정쩡한 입장, 근거가 희박한 긍정주의 등 때문에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막연한 대화주의자' 인 하버마스 식으로 모더니즘의 기득권을 유럽사회가 그대로 가져가려는 의도도 간혹 거슬린다.

바로 그런 요소 때문에 '지구화의 길' 은 꼼꼼히 읽어볼 가치가 있는 책이다. '저들의 논리' 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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