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둥이의 간은 위험하다? 미국 정부 장기이식 가이드라인 논란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미국의 한 시민이 장기 기증서를 작성하고 있는 모습. 앞으로 미국에선 장기기증서에 자신의 성관계 여부를 적어야 할지도 모른다.[사진=뉴욕데일리 웹사이트]

미국에서 때아닌 ‘바람둥이 장기’ 논란이 일고 있다. 미 정부가 여러 사람과 잠자리를 한 사람의 간과 심장 등을 타인에게 이식하면 위험하다는 경고 가이드라인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MSNBC 방송에 따르면 미 질병통제예방센터(CDC)는 최근 장기이식과 관련한 새 가이드라인을 공개했다. 여기엔 “지난 1년 동안 성관계를 가진 상대가 두 명 이상인 사람의 장기는 기증자의 건강 여부와 상관없이 이식하기에 위험하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여러 사람과 성관계를 가지면 후천성면역결핍증(AIDS), B·C형 간염 등 성접촉을 통해 전염되는 질병에 걸릴 확률이 높고, 이런 사람의 장기를 이식하면 기증받는 환자도 감염될 수 있다는 논리다. 1994년 만들어진 기존 가이드라인에선 “지난 5년 사이 동성과 성관계를 가진 남성, 성매매자, 마약 복용자 등은 장기기증자에서 제외된다”는 조항만 있었다.

물론 새 가이드라인이 장기 기증 자체를 막지는 않는다. 다만 이러한 위험성을 환자들에게 알리겠다는 것이 가이드라인의 취지다. CDC측은 “그동안 장기이식 과정에서 전염병에 걸려 생명을 잃는 경우가 많았다”며 “(이번 가이드라인은) 좀 더 안전한 장기기증을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CDC의 방침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개인의 성관계 여부를 일일이 확인할 수 없을뿐더러 너무 많은 사람을 장기기증 위험군으로 설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무엇보다 장기 이식에 가장 적합한 20대 초반 성인에게 새 기준을 적용하는 건 무리라고 지적한다. 미 국립 건강 통계센터(NCHS)에 따르면 2006년에서 2008년 사이 미국의 20~24세 남성의 30%와 여성의 25%가 지난 1년 동안 2명 이상의 상대와 성관계를 가졌다. 버지니아 주립대학의 해리 돈 아리아스 박사는 “새 가이드라인을 적용하면 전체 미국 대학생의 장기가 모두 위험할 것”이라며 “이는 이들을 성매매업자로 취급하는 셈”이라고 비판했다.

잠재적 장기 기증자를 줄일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사생활이 공개되는 걸 불편하게 여긴 사람들이 이식을 꺼릴 수 있기 때문이다. 아리아스 박사는 “만일 당신의 장기를 가족에게 기증해야할 경우 (성관계 여부를 밝혀야 한다면) 정말 부끄러울 것”이라며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거나, 아예 장기 기증을 안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미 장기기증네트워크에 따르면 미국의 한해 평균 장기기증자 수는 약 2만8000명이다. 그러나 기증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이보다 4배나 되는 11만2000여 명이다. 가뜩이나 기증자가 부족한 상황에서 CDC의 가이드라인은 장기 공급을 더 감소시킬 수 있다는 것이 반대 측의 주장이다.
CDC는 비판이 커지자 "공개된 가이드라인은 초안일 뿐 수정이 가능하다"며 한 발 물러섰다. 하지만 `바람둥이 장기`가 위험하다는 경고를 빼지는 않겠다는 입장이다. 매튜 큐너트 CDC 혈액·장기 안전국장은 “(새 가이드라인은) 이식 자체를 막지 않는다”면서도 “우리가 최우선으로 두는 건 환자의 안전”이라며 “장기를 이식하더라도 환자가 그 장기가 위험하다는 사실 정도는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CDC는 각종 의견을 수렴한 후 이달 21일 확정된 가이드라인을 미 연방 관보 웹사이트(www.regulations.gov)에 게재한다.

이승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