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2000… 휴가지 풍경이 바뀐다

중앙일보

입력

#장면1〓지난 20일 오후 3시쯤 부산 수영구 광안리해수욕장. 피서를 즐기는 수많은 인파 사이에서 한 젊은 여성이 노트북을 두드리며 e-메일을 검색하느라 여념이 없다.

서울에 있는 인터넷 관련 회사에 다니는 한창숙(27) 씨. 사업개발을 담당하는 업무 성격상 e-메일을 수시로 체크해야 한다는 그는 해수욕을 즐기다 말고 휴대폰을 통해 인터넷에 접속, ''웹서핑 삼매경'' 에 빠져 있다.

#장면2〓같은 날 오후 6시쯤 광안리해수욕장 앞의 ''디지털 PC방'' . 서울에서 피서를 온 이창기(25.대학생) 씨를 비롯한 30여명의 젊은이들이 30평 규모의 PC방을 가득 메운 채 게임.채팅에 열심이다.

스타크래프트 등 각종 게임을 좋아하는 李씨는 이번 기회를 이용, 인터넷 게임을 통해 사귀었던 ''사이버 친구'' 들을 이곳에서 만날 예정이다. 모두 5명인 그의 ''사이버 친구'' 들은 서울.부산.제주도에서 광안리해수욕장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장면3〓21일 오전 11시 미국 텍사스주 북동부에 있는 댈러스의 한 호텔. 이 곳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는 유니텔의 정석기(40) 전략마케팅팀장은 노트북으로 인터넷에 접속, 부하 직원으로부터 싱가포르 사업관련 업무보고를 받고 결재를 했다.

회사와 연락할 때 전화보다 인터넷을 더욱 자주 이용하고 있다는 그는 인터넷을 통해 사내정보망인 ''싱글'' 에 수시로 접속해 한국에 있을 때와 별 차이 없이 회사 일을 하곤 한다.

요즘 피서지의 풍경이다.

"인터넷선상에 있어라!" 휴대폰과 인터넷의 보급이 크게 늘면서 피서지의 풍속도가 바뀌고 있다. 전국의 해수욕장.호텔 수영장 등에선 휴대폰으로 e-메일을 보는 사람은 물론이고 노트북을 이용해 인터넷에 접속하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해수욕장 주변 PC방은 피서철을 맞아 손님들로 북적이고 있다.

PC방 7~8곳이 성업중인 부산 광안리해수욕장 주변의 PC방 업주들은 요즘 입가에 미소가 끊이지 않는다.

''디지털 PC방'' 의 진준호(29) 대표는 "휴가철에 접어 들면서 피서객들이 많이 찾아와 손님이 평소보다 두배 정도 늘었다" 면서 "이들 대부분은 e-메일을 체크하거나 채팅.게임을 하고 있다" 고 말했다.

인터넷 포털업체인 라이코스코리아(http://www.lycos.co.kr)가 지난 19~21일 네티즌 1만1천여명을 대상으로 ''휴가지에서 e-메일 사용 여부'' 를 설문조사한 결과, 네티즌의 66%가 ''(휴가지에서도) e-메일을 확인하겠다'' 고 응답했다.

또한 1천5백여명의 노트북 보유자 중 55%가 휴가 때 노트북을 가져가겠다고 밝혀 인터넷과 컴퓨터가 우리나라 사람의 휴가생활에 깊숙이 ''침투'' 해 있음을 보여줬다.

네티즌들은 휴가지에 노트북을 가져가는 이유로 인터넷 접속(60%) .컴퓨터 작업(28%) .회사업무 결재(5%) 등을 꼽았다.

유니텔의 鄭팀장은 "요즘엔 거리는 멀어도 ''사이버'' 로는 가깝다는 인식, 즉 ''시공 초월'' 이 인터넷을 통해 이루어진 상태" 라면서 "회사에서 직원이 휴가나 출장을 갈 때 자리가 비는 것을 우려하는 일은 거의 없다" 고 말했다.

휴가 때마다 항상 노트북을 갖고 다녀 ''인터넷 맨'' 이라는 별명이 붙은 나모인터랙티브의 엄세웅(31) 과장은 "인터넷을 e-메일 체크 등 업무에도 활용하지만 인터넷 검색.게임 등을 넉넉한 마음으로 즐기기 위해 노트북을 갖고 다닌다" 면서 "오는 8월 휴가 때도 어김없이 노트북을 챙겨 갈 예정" 이라고 말했다.

이런 현상에 대해 일부에선 복잡한 생각을 떨치고 편히 쉬어야 할 휴가까지도 일의 연장선상으로 만들어 개인의 사생활을 구속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고 아쉬워하기도 한다.

현대건설의 주경종(32) 대리는 "인터넷과 휴대폰 보급으로 언제, 어디를 가도 회사와 연락할 수 있게 돼 있다" 면서 "꼭 필요한 연락은 어쩔 수 없겠지만 이런 상태가 계속되면 개인의 사생활이 아예 없어지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 고 푸념했다.

인터넷비즈니스 포털업체인 후이즈(http://www.whois.co.kr)의 은진은(35) 해외사업본부장은 "무선 인터넷의 발달로 모든 ''생활의 인터넷화'' 는 필연적인 것" 이라고 전제하고 "휴가뿐만 아니라 각 가정의 생활상도 더욱 빠른 속도로 바뀔 것" 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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