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순원문학상 김애란 작가의 '특별한 축사' 전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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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황순원문학상, 중앙신인문학상과 중앙장편문학상 통합 시상식이 2일 서울 서소문 오펠리스홀에서 열렸다. 이날 시상식의 화제는 단연 김애란 작가의 축사였다. 김씨는 황순원문학상을 받은 윤성희 작가에게 유머 넘치면서도 감동적인 축사를 전했다. 온라인 중앙일보에서 축사 전문을 소개한다. [편집자주]

<2011년 황순원문학상! 윤성희 선배님 축사/ 수상작 (부메랑)>
김애란

최근에 윤성희 선배와 술을 마신 적이 있습니다. 며칠 전에 있던, 편혜영 선배의 시상식 뒤풀이 자리에서였는데요. 성희 선배는 저와 함께 혜영 선배의 축사를 맡기로 해 전날 밤부터 잔뜩 긴장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축사의 어려움에 대해 서로 엄살을 부려가며 이런저런 문자를 주고받았습니다. 성희 선배는 자기가 쓴 축사가 시원찮은 것 같다며, 자기는 외모로 승부할 테니 감동은 네가 맡으라고, 후배인 제게 엄청난 부담을 주었습니다. 저는 `아! 축사를 둘이 하면 이런 일이 벌어지는구나, 세상에 믿을 선배 하나 없구나` 생각하며 노트북 앞에 앉아 괴로워했습니다. 선배는 혜영 선배 시상식 날 새로 산 청바지와 재킷을 입고 혼자 미용실까지 다녀오는 등 자기중심적인 행동을 보였습니다. 원고를 쥔 손을 바르르 떨며, 연단에 오르기 전에는 제게 립글로스를 바르는 게 좋을지 어떨지도 물어왔고요. 이윽고 식이 열리고, 선배가 앞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더듬더듬 준비한 원고를 읽어나가기 시작하는데…… 그때부터 주위 공기가 미묘하게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선배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말들이, 마치 선풍기를 통해 흘러나오는 더운 바람마냥 실내 온도를 알맞게 덥혀주고 있었으니까요. 저는 맨 앞자리에 꼼짝 않고 앉아 선배의 축사를 경청했습니다. 그리고 `아! 축사를 둘이하면 이런 일이 벌어지는구나, 세상에 형만한 아우는 정말 없구나` 생각했습니다.

오늘도 분명 그럴 테지만 그날 우리는 술을 많이 마셨습니다. 한껏 멋을 내고 오고도 그런 스스로가 어색해 하루 종일 변명하고 쑥스러워한 성희 선배는 긴장이 풀어진 탓인지 맥주를 무서운 속도로 흡입하고 있었습니다. 성희 선배는 아무리 사소한 화제라도 아주 열심히 얘기하는 버릇이 있는데, 그날도 그런 식으로 적극적인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본디 이야기를 잘하는 사람들이 그렇듯 두 손을 부지런히 움직여가면서요. 그런데 그때 뭔가 이상한 게 눈에 띄었습니다. 선배의 양 손바닥이 온통 파랗게 물들어 있던 겁니다. 저는 선배가 요새 손바닥에 멍이 들 정도로 소설을 쓰나 의아했지만, 실은 선배가 새로 산 청바지의 염료가 손에 묻어 그런 거란 걸 뒤늦게 알게 됐습니다. 그 청바지는 선배가 오늘 황순원문학상 시상식 때 입으려고 사놓은 것이라는 것도요. 아끼고 쟁여뒀던 것을, 동료 작가를 축하하기 위해 먼저 꺼내 입은 거였습니다. 저는 기껏 미용실까지 다녀와 놓고는, 퍼래진 손을 새처럼 열심히 파닥거리며 대화하는 선배의 모습이 재밌어 한참 웃었습니다. 그리곤 선배에게 `오늘 선배 모습이 선배 소설 속 인물들과 닮았다`고 했지요. 어딘가 틈이 많은 인물들. 그러나 가늘게 빛이 새어나오는 문처럼, 문 안쪽의 어둠을 가까스로 밀고 나와, 우리도 미처 몰랐던 마음의 테두리를 보여주고, 어느 때는 어둠을 극장으로 바꿔주기도 하는, 그런 틈을 가진 인물들을요. 그날 새벽, 해장국집에서 뒤늦게 언니의 손을 본 정홍수 선생님은 언니가 무슨 병에 걸린 것은 아닌지 걱정하며 술에 취해 깜짝 놀란 말투로 물으셨습니다.

"성희야 너 손이 왜 그러니?"
물론 성희 선배의 이런 덜렁거림이 사람을 곤란하게 할 때도 있습니다. 7년 전인가? 안면이 거의 없던 선배와 단정한 메일을 주고받은 적이 있는데, 선배는 그때 제게 몇 마디 짧은 인사를 건네며 끝에다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내년에는 더 좋은 작품 많이 쓰길 바랄게요. 너도 이제 더 열심히 해야겠네요."

저는 두 눈을 끔벅이며 선배가 보낸 편지를 한참 동안 쳐다봤습니다. 아무리 제가 후배라지만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처자에게 `너도 이제 더 열심히 해야겠다`니.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하지만 저도 데뷔한 지 얼마 안 되었던지라 `아 작가들은 원래 이렇게 야자를 금방 트나보다` 생각하며 다음 편지를 읽었습니다. 방금 읽은 메일 뒤에 선배가 거의 애원하는 조로 달아놓은 `이것 먼저 읽으세요`라는 제목의 편지가 도착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선배는 당황함을 감추며 이렇게 변명했습니다.

"제가 방금, 후배님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중대한 오타가 하나 있더라고요.
너도->저도
수정해서 읽어주세요. 멋지게 편지 쓰려 했는데, 오타가 나서, 좀 창피합니다. 그럼, 늘 건필하세요."

선배는 `저도 더 열심히 하겠다`는 말을 `너도 더 열심히 해라`라는 말로 잘못 적은 거였습니다. 그 뒤로도 선배는 제게 중요한 오타가 있는 편지나 메시지를 몇 번 더 보냈습니다. 이제 와 말이지만 데뷔 초 제가 상상했던 소설가의 모습은 이런 게 아니었습니다. 제가 꿈꿔왔던 소설가의 모습은 어딘가 우수에 차있고, 스스로에게 엄격하며, 세상에 대해 모르는 게 없고, 단단한 침묵을 품고 사는, 그런 거였습니다. 하지만 선배는 문단의 공익근무요원이라 불릴 만큼 타인에게 관대할뿐더러 자신에게도 관대하여 술자리서 과음과 폭음을 일삼고, 입으로는 부끄럼이 많다 말하면서도 목소리가 크고, 여러 사람 앞에 서는 걸 불안해 하지만 어느 때는 학급 반장처럼 사람들을 통솔하며 복잡한 일을 척척 해나가는 사람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윤성희 작가는 예민하고 내성적인 사람일 거라 상상하지만, 제가 본 선배의 모습 중엔 뜻밖의 장면이 많았습니다. 성희 선배는 십자수를 잘 놓을 것 같지만 그보다는 운전을 잘합니다. 성희 선배는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할 때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을 것 같지만, 그보다는 엄마처럼 맞장구를 쳐주고 추임새를 잘 넣어줍니다. 때문에 누군가가 고민을 털어놓으면 온힘으로 지지해주고 공감해주지요. 활달한 사람들은 자기중심적으로 되기 쉬운데, 성희 선배는 끊임없이 주위를 살피고 배려하며, 말보다 몸이 먼저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성희 언니를 가끔씩 오래 봐온 동생으로서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가 상상한 작가의 모습은 이런 게 아니었다고. 그렇지만 실은 이쪽이 더 마음에 든다고요. 작가에게 `사람 좋다`는 말은 더러 모욕적으로 쓰이기도 하지요. 그렇지만 세상에 그 드물다는, 그 100명 중 한 명 나올까 말까 한다는, `작품도 좋고 사람도 좋은` 작가가 정말로 존재한다는 걸 저는 선배를 보고 알았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선배는 또 파래진 손을 마구 휘저으며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내 안에도 온갖 더러움이 많다고 얘기할 테지만, 제가 그걸 전혀 모르고 드리는 말씀은 아닙니다. ^^;;

성희 선배 소설에는 빈틈 많은 인물들뿐 아니라 귀가 닳고 오래된 사물들도 자주 등장합니다. <부메랑>에도 나오는 것처럼 `이응이 눌러지지 않는 휴대전화`라든가 `고장 난 세탁기` `통닭가게에서 나눠준 병따개` 같은 것들이요. 그래서 선배의 소설에선 선배의 표현처럼 `벌레 먹은 사과들을 모아두었다가 담아놓은 잼`과 같은 맛이 납니다. 그리고 그렇게 어딘가 모자라고 부서지고 `생명력` 긴 사물 안에서 저는 종종 제가 쓴 적 없지만 쓴 것 같은 이야기를 만납니다. 그리고 `아! 나도 이런 이야기를 좋아했지! 이 이야기가 내 이야기였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선배는 언젠가 제게 그랬습니다. 서로 각자 다른 소설을 써도 이야기들은 서로 연결돼 있는 것 같다고. 선배를 비롯해 다른 작가들을 일 년에 몇 번 안 봐도, 많은 얘기를 나누지 않아도, 부쩍 친근하게 다가오는 건, 우리가 소설을 쓰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른 글은 어려워 간신히 소설만 쓴다는 언니. 그렇게 가까스로, 그러나 기껍게, 유리가루를 먹인 연줄처럼 말들과 말들이, 이야기와 이야기가 연결돼 있다는 사실이 고맙습니다.

가끔 저는 소설이 산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제 앞에 떡하니 거대하게 버티고 있는, 제 힘으론 도저히 넘을 수도 없고, 허물 수도 없는 산처럼 여겨질 때가요. 그럴 때는 선배가, 혹은 다른 동료나 선배들이 그 산을 휘감고 도는 물처럼 다가오곤 합니다. 산 속에서 그리고 산 밖에서 편안하게 흐르며 졸졸졸졸, 조금 쉬어가도 괜찮다고 일러주는 시냇물이요. 이따금 선배의 소설들은 제게 말합니다. 산을 무서워하지 말라고, 저 안에 살아 있는 것들이 많다고, 산짐승도 있고, 야생화도 있고, 등산객이 버리고 간 재미있는 물건도 많은 데다, 심지어는 할 말 많은 귀신도 있다고요. 그래서 저는 종종 그 안에다 발 담그고 목축이며 정신을 차립니다. 그리고 그때 그 산은 제게 조금은 감당할 만한 것이 되는 것 같아요.

그러니 때때로 우리가 허공에 던진 말들의 부메랑이, 마음의 부메랑이 어디론가 가는 듯하다 결국 혹은 겨우 제자리로 돌아오고, 가지 말아야 할 자리로 가거나, 잘못된 장소에 도착한다 하더라도. 우두커니 우리 앞에 돌아온 이야기들을 다시 공들여 바라보며 그게 우리에게서 떠났을 때와 돌아왔을 때, 같은 것이 아님을 저도 선배처럼 믿어보고 싶어요. 그리고 그렇게 한 번 더 던지고, 다시 온힘을 다해 한 번 더 던지는 안부 안에서 선배의 마음이 평안했으면 좋겠습니다. 언어가, 마음이, 사람이, 순결하지 않아 때때로 오해받고, 상처 주며, 절망하는 일도 잦겠지만. 떠난 자리로 번번이 돌아오고야 마는 소설의 성질을 이야기의 관성을 앞으로도 받아내지 않을 도리가 없겠지요. 부메랑이 돌아오는 동안, 저도 눈 덮인 선풍기에서 쏟아지는 눈발을 맞으며 언니 옆에 가만히 쪼그려 앉아, 불을 쬐듯 눈을 맞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리곤 탈탈탈탈 돌아가는 선풍기의 프로펠러를 보며 이렇게 중얼거릴 거예요.

"저 파란 날개 좀 봐. 성희 언니 손바닥을 닮았네!"
아울러 저도 오늘 손바닥에 푸른 멍이 들 정도로 선배에게 큰 박수를 보내드리고 싶어요.
축하해요, 언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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