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이 안 보여도, 소리 못 들어도 … 삶이란 마라톤에 포기는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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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490년, 그리스병사는 페르시아 대군을 물리친 승전보를 하루 빨리 전하기 위해 마라토나스에서 아테네에 이르는 40여km를 죽을 힘을 다해 달렸다. 그로부터 2501년 뒤인 2011년 11월 13일, 스스로 ‘극기’의 승전보를 알리는 전령사가 돼 같은 길을 달린 사람들이 있다. 앞을 볼 수 없어도, 소리를 듣지 못해도, 다리가 불편해도, 그들이 달리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바로 ‘제29회 아테네국제마라톤’에 참가한 한국의 장애인 마라토너들이다. 풀코스와 10km·5km코스로 나뉘어 달린 1만8000여명의 참가자 중 장애인은 이들 뿐이었다.

그리스 아테네, 글·사진=양훼영 행복동행 기자

지난 13일 제29회 아테네국제마라톤에 참가한 10명의 한국 장애인 마라토너들은 악천후 속에서도 모두 완주했다. 왼쪽부터 이주호·최윤식(동반주자)·장영근(동반주자)·임지원·이동우·신영철(동반주자)·이효성·김상영씨.

경기 당일, 아테네 인근 지역의 날씨는 험악했다. 대회 시작 한 시간 전부터 비가 쏟아지고 바람까지 거셌다. 체감온도가 3℃ 아래로 떨어졌다. 코스 중에는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도로도 있어 무척이나 미끄러웠다. 웅덩이와 비포장도로, 오르막길도 많은 난코스였다. 하지만 그 악조건 속에서도 한국에서 온 10명의 장애인 마라토너들(시각 3명, 청각 2명, 지체 2명, 지적 2명, 자폐 1명)은 모두 완주했다.

이들은 에쓰-오일이 한국장애인재활협회를 통해 진행한 ‘감동의 마라톤’ 프로젝트에 선발돼 그리스 땅을 밟았다. 올해로 6회째인 ‘감동의 마라톤’은 장애인들의 자존감 향상과 건강증진, 장애인스포츠문화 활성화 등을 목표로, 장애인 마라토너에게 국제대회 참가 기회를 마련해주고 있는 에쓰-오일의 사회공헌프로그램이다. 2006년 싱가포르를 시작으로, 지난해까지 시드니·베를린·뉴욕·베이징의 마라톤 코스를 총 50명의 장애인이 달리고 돌아왔다. 올해도 장애유형, 마라톤 경험 유무, 훈련성과와 현장평가 등을 고려해 9명의 주자가 최종 선발됐다. 여기에 그룹 ‘틴틴파이브’의 멤버로, 망막색소변성증으로 시력을 잃은 가수 이동우(41)씨가 홍보대사를 겸해 합류했다.

#1 꼴찌에게 쏟아진 갈채

“브라보, 브라보, 브라보~!”

결승점이 마련된 아테네 파나티나이코 경기장. 오른손으로는 지팡이를, 왼손으로는 동반주자의 팔을 붙잡고 달린 임지원(28·여·지체1급·국회도서관 행정직원)씨가 들어서자 경기장에는 환호성이 가득 찼다. 모든 사람들이 뜨거운 박수로 임씨의 마지막 레이스를 격려했다.

5km코스를 달린 임씨의 최종기록은 2시간 7분. 42.195km 풀코스의 1등 주자보다 겨우 5분 빠른 기록이다. 1만8000여명의 참가자 중 말 그대로 꼴등이었다. 하지만 임씨에게 쏟아진 갈채는 1등 못지 않았다. 임씨는 “여기 오기 전에 국내 대회를 뛴 적이 있는데 그 땐 응원해주신분들이 손에 꼽을 정도였어요. 그런데 오늘은 뛰는 내내 ‘브라보’를 들었어요. 굉장히 가슴이 벅찼어요”라며 “마라톤은 굉장히 매력적인 운동 같아요. 기록보다는 자신만의 목표를 세우고 완주하는 거잖아요. 그 행위 자체가 순수하고 아름다워요”라고 말했다.

임씨는 어린 시절 교통사고로 장애를 얻은 뒤 오래 걷거나 뛴 적이 없었다. 이번 프로젝트에 지원하기 위해 마라톤을 시작했다. “5km가 어느 정도일 거라는 감이 없어 그저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막상 운동을 시작하니 쉽지 않았다. 처음 1km를 뛰었을 땐 1시간이나 걸렸다. 불편한 몸으로 운동하는 모습을 남에게 보여주고 싶지도 않았다. “집 밖으로 운동하러 나가는 것도 저에겐 용기였어요. 마라톤 연습을 하면서 건강해질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사람들의 부담스러운 시선도 스스로 깰 수 있었어요.”

 임씨는 아테네 여행 내내 분위기메이커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어디서나 임씨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마라톤 당일 새벽에는 듣지 못하는 권종섭(45·청각1급·건축업)씨를 위해 응원의 편지까지 써서 건넸다. 덕분에 ‘지원다르크’라는 새로운 별명도 얻었다. 이동우씨가 “지원씨의 용기에 몇 번이나 감동했다”며 지어준 별명이다. 5km를 함께 뛴 노선영(24·여·청각2급·패션디자인전공)씨 역시 “아픈 다리로 열심히 뛰는 지원언니를 보며 겸손을 배웠어요”라고 말했다.

#2 “경쟁 대신 진정한 자유 느꼈어요”

마라톤은 혼자서 달리는 스포츠다. 외롭고 고통스럽다. 하지만 김상영(21·자폐1급·회사원)씨의 동반주자로 10km코스를 뛴 이효성(24·지체4급·트레이너)씨에게는 달랐다. 이씨는 김씨와 함께 뛰기 위해 경쟁심이나 욕심을 내려놨다. 오히려 뛰는 내내 자유로웠다. 흰 끈으로 연결된 두 사람은 서로에게 맞추며 한 발 한 발 내디뎠다. 결승선도 동시에 밟아 1시간 5분 21초를 기록했다.

운동 안에는 이씨의 희로애락이 담겨있다. 육상선수였던 고등학교 시절에는 단상에 오르는 기쁨을 경험했지만 산악자전거를 타다 절벽에서 추락해 척추와 머리를 크게 다쳤다. 주치의는 그에게 “평생 운동은 못할 것”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이씨는 매일 새벽 재활운동에 매진했고, 결국 다시 뛸 수 있게 됐다.

“선수 시절에는 모든 게 경쟁이었어요. 운동을 하다 다쳤기 때문에 운동을 다시 안 하려고도 했죠. 하지만 아테네에 와서 상영이랑 함께 뛰니까 경쟁이란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어요. 어떤 것에도 구속 받지 않는 느낌이 들었고, 늦게 뛰어도 심지어 꼴등에게도 박수 쳐주는 사람들을 보면서 굉장히 자유롭다고 느껴졌어요.”

이씨는 마라톤 외의 일정에도 김씨와 함께 하면서 많은 것을 느꼈다. 오직 “네”라는 한 단어로만 감정을 표현하는 김씨를 친동생처럼 돌봐 일행들이 형제로 오해할 정도였다. 이씨는 “사실 상영이가 이렇게 잘 따를 줄 몰랐는데, 말이 아닌 가식 없는 진실한 마음으로 다가가니까 잘 따라오더라고요. 이해하고 배려하면 어려운 게 없다는 걸 알게 됐죠. 저한테 상영이는 많은 경험을 할 수 있게 해준 좋은 파트너였어요”라고 말했다.

#3 코스는 보이지 않아도 달려갈 ‘길’은 보인다

“아테네에서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하다니 정말 감격이에요. 오늘 정말 즐겁게 뛰었는데, 마지막에 골인할 땐 이제 곧 끝난다는 생각에 들어오기 싫고 아쉽더라고요.”

 망막색소변성증으로 점점 시력을 잃어가고 있는 박준식(47·시각3급·자영업)씨는 4년 경력의 마라톤 마니아다. 용왕산마라톤클럽 회원으로, 월요일만 빼고 매일 새벽 목동운동장에 모여 10km씩 달린다. 공식적으로 풀코스를 20회나 완주했다. “시각장애에 허리수술까지 받게 되면서 건강을 위해 마라톤을 시작했어요. 앞만 보고 혼자 달리면 되고, 길도 아스팔트라 거치적거리는 게 없어 저한테 딱 맞았죠.”

 또 다른 주자인 이주호씨(41·시각1급)도 같은 병으로 실명했다. 실로암시각장애인복지관에서 일하고 있는 그는 2년 전 마라톤을 시작했다. 이번 아테네에서는 동반주자와 함께 뛰며 4시간 14분 25초를 기록했다. “막 뛰고 들어왔을 땐 힘들어서 생각이 안 나다가 며칠 지나면 바둑에서 복기하듯 뛸 때의 감정이 새록새록 생각나요. 그래서 마라톤이 좋아요. 한번 뛰고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 다음 대회가 언제인지 바로 찾게 되거든요.”

이번 대회에는 ‘감동의 마라톤’ 프로젝트 관계자 두 명도 장애인들과 함께 뛰었다. 두 사람 모두 동반주자로 뛴 것은 물론 마라톤 자체가 처음이었다. 임지원씨의 동반주자였던 에쓰-오일의 신영철 사회복지사는 “경쟁이 아니라 스스로의 목표를 위해 뛰는 참가자들에게서 큰 감동을 받았다. 앞으로 ‘감동의 마라톤’ 사업을 더욱 열심히 운영해 더 많은 사람들이 마라톤에 참여할 수 있게 하겠다”고 말했다. 이동우씨와 함께 5km를 뛴 장애인재활협회의 장영근 사회복지사도 “참가자들을 인솔하기만 했던 지난해와 달리 올해는 코스 구석구석을 시각장애인과 함께 뛰어보니 장애인 마라토너들의 고충을 제대로 알 수 있었다”며 “내년에는 프로그램 운영에 있어 장애인 입장을 더 고려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리스 아테네, 글?사진=양훼영 행복동행 기자 hwestyl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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