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칼린을 보러 갔다 … 화려함 대신 뭉클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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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20년 만에 무대에 선 박칼린(왼쪽)은 상처 입은 여성의 심리를 무난하게 연기했다. 더 눈에 띤 건 아들을 연기한 한지상(오른쪽)이었다. 2년간의 군 공백이 무색할 만큼 빼어난 가창력을 보여줬다. [뮤지컬 해븐 제공]

이 기사는 스포일러(Spoiler·작품의 주요 내용을 알려주는 것)가 될지 모른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작품에서도 막판에 노출되는 게 아니라, 공연 시작 15분 만에 드러나니 말이다. 뮤지컬 ‘넥스트 투 노멀’(Next to Normal)은 미국의 평범한 중산층 가족을 그린다. 아빠·엄마·아들·딸 네 명이 나온다. 2년 전 토니상을 받고 퓰리처상도 받았다. 가볍지 않은 문제작이라는 얘기다. 이쯤 되면 얼추 짐작이 된다. 한 가정에서 몸을 부대끼며 살지만, 사실은 다들 겉돌며 소통하지 않는 현대가족 말이다. 영화 ‘아메리칸 뷰티’의 뮤지컬판 정도? 예상대로였다.

초반부는 아주 화목한 가족의 모습이었다. 따뜻하고 멋진 엄마, 자상하고 능력 있는 아빠, 영리한 아들, 그리고 남자 친구 문제로 고민하는 딸. 곧 균열이 생겼다. 근데 단지 작은 틈이 아니었다. 폭풍처럼 뒤통수를 내리쳤다. 아들은 존재조차 없었다.

 아들은 겨우 8개월 때 장폐색으로 세상과 등졌다. 무대에 등장하는 아들은 엄마, 다이애나(박칼린·김지현)의 환상이었다. 자기가 바라는 아들상, 혹은 남성상을 죽은 아들에게 투영하며 17년을 지내온 것이다. 환영 속 인물과 대화를 나누는 그가 정상일 리는 없을 터. 정신질환으로 꾸준히 치료를 받아오지만 상태는 좀체 나아지질 않았다. 아빠는 지쳐가고, 소외된 딸은 삐뚤어져 갔다. 끝없이 추락하는 3인의 가족, 극약 처방이 필요했다. 어떤 방법을 쓸까. 과연 엄마는, 또한 가족은 정상(normal)으로 돌아올까.

 이 뮤지컬의 핵심은 아들이 죽었다는 사실이다. 창작자는 이를 끝까지 숨기다 마지막 한방으로 남겨 놓을 수도 있었을 듯싶다. 왜 일찍 패를 보여줬을까. 극적 반전을 원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아들이 죽었다는 놀라운 ‘사건’이 아닌, 아들 죽음 이후 가족의 ‘정서’가 주된 관심사라는 얘기다.

 이토록 심리에 천착한 뮤지컬, 여태 없었다. 뮤지컬 하면 화려한 쇼가 있거나, 아니면 죽고 싸우고 이별하고 웃겨야 하지 않은가. ‘넥스트 투 노멀’엔 그런 ‘극적인 요소’가 없다. 기껏해야 엄마가 정신과 의사를 만나는 것 정도? 나머지는 엄마도, 아빠도, 딸도 자신만의 동굴에서 응어리진 내면을 응시할 뿐이다.

 일상의 연속이다. 특별한 사건이 없다. 드라마틱한 노래가 나오기 어렵다. 가슴을 뻥 뚫어주는 시원한 아리아는 귀를 씻고 들어봐도 없다. 읊조리듯 노래를 하는가 싶더니, 마무리가 되지 않은 채 다음 장면으로 슬쩍 넘어가고, 거기서 또 다른 소소한 일상과 엮이다 또 내면을 토로하는 식이다. 한데 이런 방식, 꽤 세련됐다. 감정을 지나치게 쥐어짜지 않고 무심한 듯 슬쩍 드러내는 상처가 오히려 더 쓸쓸히 객석을 휘감았다.

 ‘넥스트 투 노멀’ 한국어 공연은 박칼린이 20년 만에 배우로 나서 화제가 됐다. 음악감독이었을 때와는 또 다른 매력으로 다가왔다. 다만 어눌한 한국말 탓인지 가사 전달에 있어선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강렬함과 화려함을 거세시켜도 뮤지컬이란 장르가 존재할 수 있음을 작품은 보여주고 있다. 이 겨울, 곱씹어 볼 만한 수작이다.

▶뮤지컬 ‘넥스트 투 노멀’=2012년 2월12일까지. 서울 종로구 연지동 두산아트센터 연강홀. 6만·9만원. 02-744-4033.

최민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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