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길 산책] '쑥쑥쑥' 자라는 벼포기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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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복을 앞둔 성하의 불볕에 바람도 녹은 듯 풀잎 하나 까딱하지 않고 벌레들마저 숨을 죽인 채 헐떡이고 있다. 온다 온다 하는 비는 소식도 없고 포장된 행길을 조금만 벗어나면 여지없이 먼지가 풀썩인다.

이름만 들어도 입안에 침이 괴는 '이천 쌀' 의 본고장인 이곳 쇠경이들(이천시 목면 서경리)에도 사정은 마찬가지. 백두대간의 한 줄기인 차령맥(車嶺脈)이 내달리다 뱉어놓은 마옥산 아래 동쪽으로 펼쳐진 벌판 곳곳에 한창 꽃망울을 터뜨린 개망초가 목마름에 잎을 늘어뜨린 모습이 한껏 힘겨워보인다.

하지만 모처럼 촌놈 본색이 드러난 걸까, 온몸이 땀으로 흥건할 정도로 논두렁길을 하릴없이 헤집고 다녀도 오히려 마냥 상쾌하기만 하다. 워낙 이름이 높은 명산품의 산지를 밟아보니 자못 흥분마저 된다. 두벌매기가 끝난 논마다 장하게 자라고 있는 벼포기에선 벌써부터 쌀을 만드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린다.

삼십도가 넘는 열기를 물로 반죽해 어떻게 하면 까탈스런 인간들의 입맛에 맞출까 실험을 하는 중일 테다.

벼란 과연 '태양의 아들' 이다. 인간들은 자기네 품만 따져 쌀 한톨 건지는 데 여든 여덟번 손이 가느니 엄살(?)을 떨지만 정작 벼의 입장에서는 그보다 열백배는 더하리라.

툭하면 싸움질이나 하는 인간들이 뭐가 곱다고 저 야단인지…. 나같은 먹물은 그저 미안스러울 정도로 고마울 뿐이지만, 그 참된 속내는 농부들은 알 듯 싶다.

"벼 말이여, 아 자식도 상자식이지-. 비가 오면 오는 대로, 안오면 그런 대로 한치도 눈을 뗄 수가 없으니께. 그러니 지가 잘 영글지 않으면 어쩔 거여."

평생을 벼와 더불어 살아왔다는 이곳 토박이 정해원(丁海遠.76)씨의 투박한 선답(禪答)이다. 그의 말대로 원래 농심이란 제논에 물이 그렁그렁하고 꼿꼿이 잘 자라고 있는 벼를 보고 있으면 나랏님도 부럽지 않은 법이다.

그러고 보니 꽤나 가물었는데도 이곳 논들이 마르지 않는 까닭이 궁금해 질문을 하려는데 갑자기 위-잉 하는 모터소리가 들려온다. 관정에서 물을 퍼올리는 소리다. 예전 같으면 봇도랑을 요령소리가 나도록 오르락내리락해야 할 판인데, 참 세상 좋아졌다.

그제나 이제나 물보기가 논농사의 기본이자 제일인 것은 마찬가진데, 물이 있는 개울을 막은 보(湺)나 저수지는 보통 십여리는 떨어져 있었으니. 그것도 보통때는 봇줄기에 달린 논임자들간에 순서껏 물을 나눠 대면 그만이지만 심한 가뭄이라도 들면 그야말로 벌판 전체가 온통 물전장이 돼버리곤 했다.

애지중지 키우던 자식 같은 벼포기가 새빨갛게 타들어 가는 걸 그대로 지켜볼 강심장이 진정 있을까. 해서 한쪽에선 밤을 틈타 남의 논둑에 작대기로 가짜 쥐구멍을 내 물을 훔치고, 다른 쪽에선 온가족이 눈을 부릅뜨고 물을 지키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억척스런 안식구가 있는 집에선 남녀가 유별한 점을 악용, 아예 봇도랑에 고쟁이를 훌렁 까고 앉아 남자들의 접근을 막아놓고 그 사이 봇물을 자기논에 흘려보내는 악다구니를 쓰기까지 했다.

그러다 보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욕지거리가 동네방네 울리고 심할 경우 주먹질과 함께 봇도랑에 상대를 메다꽂는 불상사도 심심찮게 벌어지곤 했다. 오죽했으면 '겨울 아저씨, 여름 개새끼' 란 농사속담이 생겨났을까. 물타령을 하는 김에 한 소나기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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