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스코치] 어릴 적 나타나는 화병의 공통적인 요소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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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수 박사의 ‘9988234’ 시크릿]

가정의학과 전문의
박민수 박사

수능시험이 끝나면 언제나 들려오는 끔찍한 뉴스가 시험을 비관한 청소년들의 자살 소식이다. 이는 죽은 아이들뿐만 아니라, 학업스트레스로 인해 힘겹게 지내고 있는 대다수의 아이들에게도 영향을 주어 더 큰 문제를 일으킨다고 본다.

본원에도 학업 스트레스 때문에 찾아오는 친구들이 많다. 학업 스트레스로 힘겨워 하는 학생들의 사례를 보며 화병의 심각성을 알아보자.

#1. 혜선이는 작년까지 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을 내며 탄탄대로를 달리던 아이었다. 부모들도 혜선이의 학업을 뒷받침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엄마 표현을 빌리자면 작년은 아이가 무섭게 달리던 때였다. 하지만 겉보기와 달리 그 질주는 위태로운 일이었다. 어느 순간 급정거를 하고 더 이상 달리지 못하는 기관차처럼 혜선이는 멈춰서고 말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고, 혜선이는 깊은 무기력증에 빠져버렸다.

혜선이는 자신이 막무가내로 달리고 있을 때 더 달리라고 채찍질만 하고 잠시 멈춰서 쉴 수 있도록 배려하지 않은 주변 사람들을 원망하고 심지어 증오하기에 이르렀다. 혜선이는 때때로 가슴이 딱딱하게 굳는 것 같고 열이 나고 숨쉬기 힘들 지경까지 답답하다고 토로한다.

#2. 명일이는 고2 남학생이다. 명일이는 심각한 만성피로에 시달리고 있다. 너무 피곤해 일상생활이 힘든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는 특별히 몸에 문제가 생겨 일어난 병이 아니라, 공부의 중압감이 만들어낸 스트레스성 만성피로증후군이었다. 명일이의 부모님은 명일이가 상위권 대학을 진학하기를 바라며 공부에 대한 주문들을 많이 하시던 분이었다. 명일이는 아주 어릴 적부터 이런 부모님의 요구와 감독, 계획 때문에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지금 명일이의 성적은 그런 부모님의 바람에는 턱없이 못 미치는 수준이다.

부모님의 욕심과 자신의 현실적 상황 사이에서 명일이의 마음은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갈피를 잡지 못하는 마음과 심한 스트레스는 명일이의 삶의 에너지를 갉아먹었다. 명일이 역시 때로 명치끝이 타오르는 듯한 작열감을 느끼곤 했다.

#3. 미지는 이제 겨우 9살 난 초등학생이다. 소아비만 치료를 위해 우리 병원을 찾은 미지는 음식 앞에서 매번 자제력을 잃고 폭식하는 아이었다. 엄마는 소아비만으로 인한 성조숙증이 걱정된다며 병원을 찾아왔지만 정작 더 심각한 문제는 미지의 상처받은 마음이었다. 조그만 미지의 스케줄은 좀 과장해 말하면 살인적인 수준이었다. 매일 같이 여러 개의 학원 수업과 특별활동을 치러야만 했던 미지는 유일한 수단인 음식으로 위안을 받고 스트레스를 해소해왔던 것이다.

미지는 상담할 때마다 '너무 화가 난다, 너무 짜증이 난다'는 표현을 자주 사용했다. 아이의 표현 그대로 아이의 마음 속에는 구체적이거나 특별한 대상을 찾을 길 없는 화나 짜증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아이들에게서 나타나는 질병의 양상은 달라도 그들에게서 발견되는 공통적인 요소가 높은 학업 스트레스로 인한 화병이다.

가파른 변화와 성장의 시대를 거쳐 온 한국인들은 경쟁과 학습에 대한 스트레스가 남다른 편이다. 사실 미국에서는 우리보다 훨씬 많은 학생들이 대학입학자격시험(SAT)을 치지만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기는 여간해서 힘든 일이다. 공부에 생명까지 걸도록 강요하는 우리 사회와 어른들의 경쟁심이 아이들에게 고스란히 전염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잘 견뎌내지 못하는 아이들은 몸이나 마음, 뇌에 심각한 문제가 생기거나, 결코 해서는 안 될 극단적인 선택에까지 이르기도 한다.

나는 혜선이, 명일이, 미지의 부모님들에게 한결같은 주문을 했다. 아이가 지금 문이 없는 뜨거운 온돌방에서 답답해 미칠 것 같은 지경에 이르렀다. 아이의 문제는 소아성장, 성조숙증, 무기력증, 만성피로증후군, 소아비만이 아니라, 출구를 찾지 못하는 갑갑한 마음이다. 나와 부모님이 합심해 아이를 질식할 것 같은 뜨거운 방에서 꺼내서 시원하고 상쾌한 초록들판으로 끌고 나오자가 주문한다.

자녀의 강점을 잘 이해하고 그 감정을 잘 살릴 수 있는 바른 길을 제시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고 오히려 부모로서 꼭 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아이의 능력과 재능에 대한 아무런 고려나 고찰 없이 부모의 일방적인 욕심대로만 아이를 키우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그것이 아이가 감당하기 버거운 일이라면 잔인하기까지 한 일인 것이다. 이는 못해도 밑져야 본전인 손쉬운 시도가 아니라, 아이의 영혼과 신체를 심각하게 훼손할 수도 있는 위험한 선택임을 다시 한 번 찬찬히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박민수 가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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