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o - 노량진 수산시장 속 ‘명당의 비밀’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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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 노량진 수산시장은 국내 최대의 내륙 수산시장이다. 800여 개 점포는 2000여 명의 삶의 터전이다.
정치인들은 서민을 상징하는 곳으로 여기고 이곳을 찾지만, 모두 그런 것은 아니다.
이곳은 시장이다. 경쟁이 있고 ‘시장의 법칙’이 살아 있다. 노량진 수산시장이 살아가는 법을 취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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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진 수산시장 2층에서 내려다본 전경. ‘앞자리’로 부르는 통로에 손님들이 몰려 있다.

10월 27일 오전 6시30분. 박원순 서울시장이 예고 없이 노량진 수산시장을 찾았다. 박 시장의 첫 공식 일정이었다. 노량진 수산시장 입구로 들어선 박 시장은 상인들과 일일이 악수하며 동서 방향으로 길게 늘어진 시장 통로를 걸었다. 박 시장 일행이 통로 가운데 지점을 지날 무렵 한 상인이 박 시장에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3년에 한 번 ‘복불복’ 추첨으로 자리 배정 #상점 위치 따라 매출 최대 10배 차이…통로 오른쪽 상점에 고객 몰리는 ‘쇼핑의 법칙’

“우리 서민을 위해 뭐 하나 팔아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상인은 “요즘 꽃게 철이니 꽃게나 팔아 달라”고 했다. 박 시장은 “장사를 아주 잘하신다”며 “제가 여러 집을 갔는데 이렇게 적극적으로 마케팅하시는 분이 안 계셔서”라고 말하면서 꽃게 2만원어치를 샀다.
그날 오후 기자가 찾아간 노량진 수산시장은 평소와 다름없이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런데 한 가지 재밌는 현상이 있었다. 박원순 시장이 꽃게를 사간 그 상점 주변에 유독 손님이 많았다. ‘박원순 효과’일까? 그렇지는 않다. 여기에는 재밌지만 냉혹한 마케팅의 법칙이 숨어 있다.

점포 위치 따라 A~F 등급
1971년 개장한 노량진 수산시장의 소매 판매장 넓이는 1만4000㎡(약 4200평)다. 시장은 생선회를 주로 파는 ‘고급’과 조개, 꽃게 등을 파는 ‘패류’, 오징어나 생선을 파는 ‘대중’, 냉동 수산물을 파는 ‘냉동’으로 나뉜다. 시장 동쪽 입구에서 정중앙까지 ‘고급’ 점포가 좌우로 자리를 잡았고, ‘패류’ 점포는 중앙을 지나 또 다른 출구까지 펼쳐진다. ‘대중’과 ‘냉동’ 상점은 시장의 가운데 자리나 뒷자리에 주로 분포돼 있다.

노량진 수산시장의 명당은 상인들이 ‘앞자리’로 부르는 통로다. 동쪽 시장 입구에서 서쪽 출입구까지 이어진 통로로 손님들이 가장 붐비는 곳이다. 노량진 수산시장 내 808개 점포는 위치에 따라 A~F 등급으로 나뉜다. A등급 점포는 약 180곳으로 대부분 ‘앞자리’ 통로 좌우에 있다. 한마디로 ‘목’이 좋은 곳이다. 박원순 시장 일행이 걸어간 통로, 그리고 박 시장이 꽃게를 산 점포 역시 A등급 자리다.

10월 27일 점심시간에 찾은 노량진 수산시장은 점포 위치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여실히 보여줬다. 사람들 대부분은 앞자리 통로에 길게 늘어서 있었다. 지하철 1호선 노량진역에서 내려오는 계단에서 가까운 곳, 동서 방향 메인 통로의 가운데 부분, 시장 출입구에서 가까운 곳에 손님들이 북적였다. 이런 장면은 10월 25일 저녁 시간에 찾아갔을 때도 비슷했다. A등급 자리뿐 아니라 남북으로 난 시장의 중앙 통로 좌우에 위치한 상점에도 사람들이 꽤 북적였다. 이곳은 B급 자리로 상점이 20여 곳이다. C급 자리인 시장 동·서·북쪽 통로에 위치한 상점에는 다섯 곳에 한 곳 정도 손님이 있었다. 시장 내 C급 자리 점포는 106곳이라고 한다.

A등급 점포끼리도 매출 차이 커
반면에 통로에서 먼 시장 안쪽 자리는 말 그대로 파리를 날렸다. A급 자리와 등지고 붙어 있는 점포는 그나마 더러 손님이 있었지만, F등급으로 불리는 시장 가운데 안쪽 자리, 특히 패류를 파는 장소는 이동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노량진 수산시장은 가로로 길게 4개 라인이 있는데 가운데 2개 라인 안쪽 자리가 특히 장사가 안 된다. 패류 매장만 해도 A급 자리에서는 조개류 30여 종, 새우 10여 종 등을 팔고 있었지만, F급 자리에서는 고작 6~7종의 어패류만 팔았다. F급 자리는 한창 손님이 많은 시간인데도 영업을 하지 않는 곳이 많았다. 한 상인은 “아예 장사를 안 하거나 일찍 들어간 곳”이라고 말했다. 점포를 창고로 쓰는 곳도 보였다. 노량진 수산시장 시설관리팀에 따르면 시장 내 F급 자리는 350개다. 한 상인은 “4개 라인 중에서 1개 라인만 빼도 통로가 넓어져 손님들이 안쪽으로 많이 올 텐데”라며 아쉬워했다. 하지만 이 경우 적어도 200여 상인이 시장을 떠나야 하는 문제가 있다. 같은 노량진 수산시장 안에서도 ‘양극화’는 뚜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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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5일 저녁 노량진 수산시장. 앞자리에 손님이 북적대는 것과 달리 뒷자리는 한산했다.

A등급 자리라고 다 같은 것도 아니다. 노량진역에서 계단으로 내려와 시장 입구 쪽을 향하는 통로에서 사람들은 주로 오른쪽에 위치한 상점에서 생선회를 샀다. 구입을 하지 않고 횟감을 고르며 걷는 손님들도 주로 오른쪽에 시선이 가 있었다. A급 점포가 좌우로 나란히 대열해 있는 통로의 너비는 2m 남짓이었지만 심리적 거리는 훨씬 멀어 보였다. 주차빌딩 쪽에서 들어오는 출입구 왼편에는 아예 점포가 없었고 오른쪽에 패류 점포가 이어졌다. A급 자리에서 생선회를 취급하는 한 상인은 “중앙 통로 가운데의 오른쪽 자리와 시장 입구 쪽 왼편에 위치한 가게 매출 차이가 3~4배는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 상인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고 말했다.

여기에는 과학과 심리가 숨어 있다. 미국의 마케팅 전문가인 파코 언더힐이 쓴 『쇼핑의 과학』에 따르면 고객의 동선에는 일정한 법칙이 있다. 언더힐은 “사람들은 무심코 오른쪽으로 움직이는 경향이 있다”며 “모든 매장 입구의 오른쪽이 황금지대”라고 강조한다. 마케터들은 출입구에서 안쪽으로 고객이 진행할 때 오른쪽을 ‘골든 존’이라고 부른다. 노량진 수산시장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자리 배정은 어떻게 할까? 대부분 농수산물 시장은 입찰을 통해 일정 기간 동안 점포를 임대하는 방식이다. 노량진 수산시장도 예전에는 그랬다. 하지만 2002년 수협중앙회가 노량진 수산시장을 인수하면서 새로운 방식을 도입했다. 바로 추첨 방식이다.

노량진 수산시장 상인들은 3년에 한 번씩 이사를 해야 한다. 이사 자리는 마음대로 정할 수 없다. 800여 상인이 모두 참여하는 추첨을 통해 자리를 정한다. 방식은 간단하다. 점포 위치별로 부여된 번호표를 플라스틱 캡슐에 넣고 상인들이 돌아가며 뽑는다. 추첨 날에는 환희와 절규가 교차한다. 이 추첨 하나에 ‘3년 벌이’가 좌우되기 때문이다. A급 자리에서 F급으로 가는 상인은 울고, 그 반대 상인은 환호한다.

자리가 결정되면 하루를 정해 시장 전체가 이사를 한다. 한 상인은 “이사하는 날 상인들 표정만 봐도 추첨 결과를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조개류를 주로 파는 B수산 주인은 “기도하는 심정 정도가 아니라 목숨을 거는 추첨”이라고 말했다. 그는 “재수없으면 3년 장사를 말아먹는다”고 했다. 시장 입구 통로에 위치한 D수산의 상인은 “이곳 사람들 아니면 그 심정을 모른다”고 말했다.

3년 매상을 건 운명의 추첨
사정이 이렇다 보니 자리를 놓고 뒷거래도 심심찮게 있었다고 한다. 노량진 수산시장은 자리 등급에 관계없이 모든 점포 사용료가 똑같다. 하지만 상점 위치에 따라 매출이 많게는 10배 차이, A등급 안에서도 3~4배 차이가 나기 때문에 웃돈을 주고 점포를 산다는 것이다. 항간에는 특A급 명당 자리의 경우 1억5000만~2억원 정도라는 말도 돈다. 하지만 대부분의 상인은 “다 옛날 얘기”라고 했다. 노량진 수산시장 시설관리팀 관계자는 “추첨 후 자리를 바꾸거나 거래하는 것은 금지돼 있다”며 “만약 발각될 경우 자리를 원상복귀시킨다”고 말했다.

노량진 수산시장은 내년부터 현대화 사업에 착공한다. 2016년까지 2024억원(국비 1417억원, 수협중앙회 607억원)을 들여 현재 지하 1층, 지상 2층의 낙후된 건물을 지하 2층, 지상 8층 시설로 바꾸는 것이다. 상인들은 현대화 이후 상점 배치를 어떻게 할 것인지 궁금해 했다. 노량진 수산시장 시설관리팀 관계자는 “현대화 작업 완공 때까지 많은 시간이 남았기 때문에 아직 세부적인 내용은 결정된 것이 없다”고 말했다.

가장 최근 추첨은 2009년 4월에 있었다. 6개월 후면 노량진 수산시장 상인들은 다시 ‘3년을 건 제비뽑기’를 해야 한다. 쇼핑의 법칙이 숨어 있는 이 추첨에 상인들이 또 울고 웃을 것이다.

김태윤 이코노미스트 기자 pin2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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