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대익 ‘다윈의 정원’] 기도, 첨단 과학도 막지 못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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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익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

이번 주말 우리의 신들은 모처럼 휴가를 떠나실 게다. 지난 목요일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있었으니 말이다. 수백만 명의 기도를 동시에 들으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을 테니 잠시 쉬게 해드리자.

 대학입시에 대처하는 한국 교회의 자세는 말 그대로 간절함이다. 고3 자녀를 둔 신자 부모의 새벽기도는 입시생을 위한 ‘100일 특별 기도회’로 진화하곤 한다. 목회자는 교인의 자녀들(만)이 좋은 성적으로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게 해달라며 입시생의 머리에 손을 얹는다. 틀림없이 어떤 교인은 자신의 간절한 마음을 신께 전달하기 위해 더 많은 헌신과 헌금을 했을 것이다. 그러니 교회는 내심 수능이 반갑다. 기존 신자의 신앙심을 더 강화하고 더 많은 신자를 불러 모으니 말이다.

 수행을 통해 욕망의 고리를 끊고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불교의 경우에도 수능이 반갑기는 마찬가지다. ‘대학입시 합격 발원문’을 양손에 들고 불공을 드리는 학부모의 모습은 가을 사찰의 흔한 풍경이다. 물론 거기서 그들이 합장하고 머리를 조아리면서 세계 평화를 기원하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작년 이맘때 서울의 한 사찰에서 수능 대박을 위한 법회에 참석했던 분이 내게 해준 증언이다. 법회도 수능 시간표를 따른단다. 즉, 수험생이 시험을 보는 시간에는 부모도 절을 하고, 쉬는 시간이 되면 그들도 쉰다는 것이다. 그런데 법회의 절정은 수험생을 가장 괴롭게 한다는 ‘수리영역’ 시간이었다. 이 시간 전후에는 작은 스님이 법회를 인도했는데 그 시간만큼은 어디선가 주지스님이 나타나 직접 법회를 주재했단다.

 물론 고3 수험생을 둔 부모의 심경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단 한 번의 시험으로 남은 인생의 빛깔이 거의 결정된다고들 하는 입시 정국을 쿨하게 즐길 수 있는 강심장 부모는 거의 없을 것이다. 부모만이 아니다. 학생의 증언들을 들어보면 자신의 인생에서 종교와의 진정한 만남이 이뤄지는 시기가 바로 요즘 같은 입시철이다. 불안감이 깊어질수록 종교는 힘을 발휘한다.

 그렇다면 이런 간절한 기도는 정말 효력이 있을까? 즉, 수능 대박을 향한 마음이 초월적 존재에게 전달되고, 그 존재가 모종의 힘을 써서 어떤 사태를 인과적으로 변화시키는가 말이다. 기도의 인과적 효력에 대한 몇 가지 과학적 실험이 있긴 하지만(부정적인 결과가 대부분이다), 우리 인간과 초월적 존재 간의 커뮤니케이션 여부를 경험적으로 검증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대신, 기도하는 사람이 자신의 그런 행동으로 인해 자신의 정신과 신체에 모종의 변화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일종의 마인드 컨트롤, 또는 긍정적 사고의 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자식의 성공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부모의 진심에 감동해 자신의 행동을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자식도 많다. 어쩌면 이것이 기도의 진정한 인과적 힘인지 모른다.

 기도는 왜 시작되었을까? 불확실하고 그래서 불안하기 때문이었으리라. 수렵채집 시기의 불확실한 환경에서 늘 불안에 떨어야 했던 우리 조상들의 특급 발명품 중 하나가 기도였을 것이다. 기도는 개인이나 집단이 내려야 할 중요한 결정을 초월적 존재(설령 존재하지 않더라도)에게 일임함으로써 불안과 인지 부담을 덜어주는 순기능을 한다. 그래서 기도를 하고 나면 마음에 평온이 찾아오는 것이다. 하지만 기도가 늘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간절히 원하고 기원했지만, 그래서 마음이 다소 편해지긴 했지만, 원치 않은 결과로 곤혹스러울 때가 적지 않다. 새벽기도를 하루도 거르지 않았는데 아들은 수능을 망쳐버리기도 한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기도를 포기하지 않는 것일까? 사람들은 자신의 믿음에 반하는 사례들보다 그것을 입증하는 사례들을 더 재빠르게 취합하는 성향이 있다. 반례가 나와도 무시하고 확증 사례만을 얼른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인지심리학에서는 인간의 이런 추론 실수를 ‘확증 편향’이라고 부른다. 기도는 우리의 확증 편향 때문에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객관적으로 기도의 응답과 반대되는 사건이 터져도 기도를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무엇 하나라도 응답과 연결되는 사례를 찾아다닌다. 가령, 출퇴근 방향이 비슷해 마주칠 개연성이 있었을 뿐인데도 그 만남을 기도의 응답으로 돌린다. 확률적으로 반반인 사건이 우연히 좋은 쪽으로 일어난 것뿐인데도 기도의 힘이라 믿는다. 심지어 히든카드도 등장한다. “그것은 신의 뜻이 아니었나 봐!” 우리는 이렇게라도 불안을 떨쳐내고 싶은 존재다.

 불확실한 세상이다. 취업의 문턱에서 고전하는 청년들은 길거리 점쟁이에게 운명을 묻는다. 백년해로를 확신 못하는 커플들이 궁합을 본다. 선거가 다가올수록 용하다는 점집에 정치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부모는 자식의 직업과 결혼, 그리고 건강을 위해 또다시 새벽을 밝힌다. 과거의 불안이 종교를 만들었다지만, 글로벌 경제의 불확실성이 주는 현대의 불안은 첨단 수학과 과학으로도 제거되지 않고 있다. 이것이 기도가 여전히 건재한 이유다.

장대익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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