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소더버그, 할리우드의 전통에 기대어 재기하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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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작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 테이프〉를 만들 당시 스티븐 소더버그의 나이는 26세, 그러니까 오슨 웰즈가 영화사에 길이 남을 불후의 데뷔작 〈시민 케인〉을 내놓을 때와 같은 나이였다.

데뷔작을 가지고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거머쥔 최연소 영화 감독이란 기록을 세운 소더버그가 미국 영화계에 일대 돌풍을 일으킬 신동으로 기대를 한 몸에 모았다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주위의 이런 기대를 배반하고 말았다. 소더버그의 화려한 데뷔작은 아직까지도 그의 재능이 도달한 정점이었던 것이다. 당시 그 자신이 반쯤 농담을 섞어 "여기서부턴 내리막이 있을 뿐이지"라고 던진 말은 그야말로 '예언'이 되고 말았다.

어려서부터 8mm 영화를 만들면서 자란 소더버그에게 카메라라는 기계는 너무도 친숙한 것이었다. 아마도 그렇기에 그는 첫 장편 영화에서 카메라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또한 카메라를 통해 다시 영화라는 것의 의미에 대해 성찰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 테이프〉는 현대에서의 황폐해진 관계와 도덕의 문제를, 카메라를 매개로 한 관음증의 문제와 연결지어 풀어나간다. 비평가들로부터 이 영화가 호평을 받을 수 있었던 건 무엇보다도 도덕적·심리적 성찰의 섬세함과 캐릭터들을 다루는 관대한 태도 덕분이었다.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 테이프〉는 당대 미국의 다른 젊은 영화 감독들에게 캐릭터 중심의 영화를 만들도록 부추겼다고도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꽤 대단한 영향력을 과시했다. 한편 어떤 이는 이 영화가 역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작품이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불과 1천 2백 달러의 저예산으로 만들어 비평적으로나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둔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 테이프〉는 그런 성공으로 인해 인디 영화의 주류화를 가능케 했고, 만약 이 영화가 없었다면 인디 영화에 대한 관심의 상당수도 아예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의미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대단한 파장을 일으킨 첫 작품에 이은 두 번째 작품인 〈카프카〉는 영화팬들로부터 기대를 품게 했지만, 결과적으로 이건 소더버그의 쇠락의 시작이었다. 체코 출신의 소설가인 프란츠 카프카에 대한 이야기를, 그의 삶과 그의 작품들을 융합해 자기 식으로 '재구성'하고자 하는 야심을 갖고 만들어진 영화 〈카프카〉는 소더버그의 얕은 철학적 상상력과 그것을 상쇄해보려는, 시각적으로는 꽤 매혹적인 '분위기'만을 보여주었을 뿐이다.

〈워싱턴 포스트〉에서 "〈카프카〉는 〈카프카〉를 만들려는 소더버그의 욕망 외에는 그 어떤 것에 대한 것도 아니다"라고 혹평을 퍼부은 것도 사실 무리는 아니었다. 대공황 시대를 헤쳐나가는 한 소년의 이야기를 담은 그 다음 작품 〈리틀 킹〉역시 꼼꼼한 디테일 묘사는 돋보이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진부하고 평범한 영화인지라 실망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이후에도 소더버그는 꾸준히 영화들을 만들었지만 어떤 식이든 센세이션을 빚어내지 못했기에 점차 거의 '잊혀진 존재'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소더버그는 기어코 다시 돌아오고야 말았다. 그가 재기하도록 전기를 마련해 준 작품이 바로 〈조지 클루니의 표적〉이다. 사실 소더버그가 엘모어 레너드(〈겟 쇼티〉와 〈재키 브라운〉의 원작자)의 소설을 영화화하려고 한다는 이야기가 퍼져나가고 있을 즈음 소더버그에게 기대를 건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는 퀜틴 타란티노와는 다른 인물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필름 누아르와 로맨틱 코미디를 우아하게 결합한 이 영화에 소더버그는 매혹을 불어넣는 데 성공했다.

〈... 표적〉을 두고 평자들은 가장 뛰어난 〈펄프 픽션〉 모방작, 엘모어 레너드를 각색한 영화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영화,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 테이프〉 이후 소더버그의 최고작이라고 떠들어댔다.

〈... 표적〉이 소더버그의 재기의 발판이라면 〈라이미〉는 그의 재기를 확실한 것으로 만들어놓았다. 그런데 참으로 의아스러운 것은 소더버그가 할리우드의 지난 전통에 귀의하면서 약진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비록 과거, 현재, 미래 사이를 비교적 자유롭게 뛰어 다니는 소더버그의 영특함을 보여주긴 하지만. 은행 강도와 여자 보안관 사이의 미묘한 관계를 그린 〈... 표적〉이나 죽은 딸의 복수를 위해 미국을 돌아다니는 한 영국인의 이야기를 다룬 〈라이미〉나 모두 6-70년대의 미국 영화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게 만드는 장르 영화들인 것이다.

〈스키조폴리스〉, 〈그레이의 해부〉처럼 거의 알려지진 않은 영화들에서 형식상의 혁신을 추구하려는 야심을 보여주었던 소더버그에게 할리우드의 '전통'은 진정한 탈출구일까? 최근작 〈에린 브로코비치〉 같은 경우는 대단한 상업적 성공을 담보로 소더버그의 얼굴을 거의 완전히 지워버렸는데...

주요 작품

1989년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 테이프 Sex, Lies, and Videotape〉(비디오 출시)
1991년 〈카프카 Kafka〉(비디오 출시)
1993년 〈리틀 킹 King of the Hill〉(비디오 출시)
1995년 〈언더니스 The Underneath〉
1996년 〈스키조폴리스 Schizopolis〉
1996년 〈그레이의 해부 Gray's Anatomy〉
1998년 〈조지 클루니의 표적 Out of Sight〉(비디오 출시)
1999년 〈라이미 The Limey〉
2000년 〈에린 브로코비치 Erin Brockovich〉(극장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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