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크도 안 마른 ‘유로 그랜드 플랜’ 4대 악재에 흔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04면

사르코지 대통령

위기도 위기지만 대응이 문제다. 포괄적인 유럽 위기 대책(그랜드 플랜)이 채 잉크도 마르기 전에 흔들리고 있다.

 주요 20개국(G20) 정상들은 5일 새벽(한국시간) 프랑스 칸에서 열린 회의에서 국제통화기금(IMF) 증액 합의에 실패했다. 내년 2월까지 결정을 미뤘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IMF는 위기에 빠진 통화권이 아니라 나라를 돕기 위해 존재한다”며 “내용도 없이 그저 숫자(증액 규모)만을 합의해 발표할 순 없었다”고 설명했다. 완성된 지 겨우 열흘가량 지난 유로존 그랜드 플랜에 브레이크가 걸린 셈이다.

드라기 ECB 총재

 시장의 허를 찌르는 회의 결과였다. 이날 유럽 주가는 2% 남짓 떨어졌다. 미국 주가는 0.5% 정도 미끄러졌다. 미 중앙은행이 3차 양적완화를 시사했는데도 이날 유로화와 견준 달러 가치는 뛰었다. 전형적인 시장의 위험 회피 움직임이다.

 파이낸셜 타임스(FT)는 G20 정상회의 참가자의 말을 빌려 “시장은 내심 중국이 선뜻 IMF 증액에 동의해줄 것으로 기대했다”며 “하지만 중국은 ‘유로존 리더들이 구체적인 계획을 내놓아야 한다’는 원론만 되풀이 해 정상들이 컨센서스를 만들지 못했다”고 전했다.

파판드레우 총리

 IMF 증액은 그랜드 플랜의 중요한 연결고리다. 앙겔라 메르켈(57) 독일 총리와 니콜라 사르코지(56) 프랑스 대통령은 IMF 도움을 받아 유럽재정안정기금(EFSF)을 1조 유로(약 1550조원)까지 늘릴 요량이었다. 이 기금은 그리스에 두 번째 구제금융을 제공하고 유럽 시중은행의 자본을 확충하는 데 쓰인다. 그리스 사태가 이탈리아로 전염되는 것을 막는 방파제가 될 것으로 기대됐다.

 IMF의 도움이 없다면 유로존은 유럽중앙은행(ECB)을 동원할 수밖에 없다. 애초 그랜드 플랜의 초안엔 ECB가 EFSF가 내놓을 채권을 보증하는 방안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지난달 27일 최종안에선 그 보증안이 빠졌다. ECB와 메르켈의 반발 탓이었다.

베를루스코니 총리

더욱이 닷새 전 취임한 마리오 드라기(64) ECB 총재는 “무엇보다 물가 안정이 중요하다”고 선언했다. 경제 성장이나 일자리 창출을 자극하고 위기에 빠진 시장을 진정시키는 건 그 다음 일이란 얘기다. 내년 2월 IMF 증액이 이뤄지지 않았을 때 ECB 동원도 쉽지 않을 듯하다.

 그랜드 플랜은 또 다른 암초를 만났다. 그리스의 정정 불안이다.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59) 총리의 리더십이 사실상 무너졌다. 재신임을 받기 위한 조건인 과도 거국내각 구성이 꼬이고 있다. 제1 야당인 신민주주의당이 참여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그들은 조기 총선과 추가 긴축 불가를 주장했다. 집권 사회당 내에서도 추가 긴축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채권 금융회사 손실분담(원리금 탕감)+그리스의 추가 긴축’은 그랜드 플랜의 두 번째 조건이다.

 글로벌 시장도 그랜드 플랜에 호의적이지 않다. 시장은 시시각각 이탈리아 목을 조르고 있다. 지난주 말 이탈리아 국채 값은 또 떨어졌다. 그 결과 10년 만기 국채 수익률(시장 금리)이 6.1% 선에서 6.4% 선으로 뛰었다. 하루 새에 0.3%포인트(30bp) 가까이 오른 것이다. EFSF 증액이 신속하게 이뤄지기 힘들어진 탓이다.

 설상가상으로 ECB 정책위원인 이브 메르쉬 벨기에 중앙은행 총재는 “이탈리아 정부가 재정개혁 약속을 제대로 지키고 있는지를 살펴보기로 했다”며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다면 이탈리아 국채 매입을 전면 중단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는 이탈리아 국채의 추가 매입을 유보한 3일 통화정책회의 결정보다 한 걸음 더 나가는 조치다.

 시장은 7일 브뤼셀에서 열릴 유로존 재무장관 회의를 주목하고 있다. 유로존이 스스로 해결책을 찾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어떤 대책을 내놓을지 관심이다. 로이터 통신은 “그랜드 플랜은 최근 증시 회복의 원인이었다”며 “재무장관회의가 보완책을 내놓지 못하면 시장의 실망이 클 것”이라고 전망했다.

강남규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