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라 왜 지켜야 하는지, 장병 여러분 감 잡히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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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3일 강원도 원주시 인근 공군 제8전투비행단 ‘치악관’에서 전국 첫 병영 인문학 콘서트를 끝낸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앉은 이)이 장병들에게 저서에 서명을 해주고 있다.

“요새도 군대에서 이런 농담하는지 모르겠는데, 대한민국에서 제일 편한 자세로 들으시면 됩니다.”

 객석이 빵 터졌다. 유홍준(62·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 전 문화재청장이 병영 인문학 콘서트를 연 3일 오후 강원도 원주시 인근 공군 제8전투비행단(단장 신익현 준장). 기지교육관인 ‘치악관’을 꽉 채운 500여 명 장병과 장교들은 소녀 아이돌 그룹을 맞이하듯 박수와 환호로 유 전 청장의 강연 ‘한국문화의 뿌리’에 빠져들었다.

 “고구려 고분벽화 중 하나인 무용총 수렵도입니다. 이 왼쪽 아래 졸고 가는 사냥꾼을 보세요. 전날 과음했는지 말도 브레이크를 잡았잖아요. 그 시대가 얼마나 여유로웠는지 한 눈에 보여주는 그림이죠. 명작이 지닌 공통점이 바로 이 유머입니다.”

 장병들이 ‘와’ 웃었다. 전군 사상 처음 인문학 강좌를 연 부대 사병들답게 눈이 반짝이고 귀가 쫑긋했다. 최근 ‘무릎팍도사’ ‘1박2일’ 등 텔레비전 예능 프로그램에 등장하면서 전국에 얼굴을 알린 스타급 강사를 모신 자부심이 흘러넘쳤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로 이름난 유홍준 전 청장이 병영에 강연하러 오게 된 사연은 지난 9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안녕하십니까? 권기호 대위입니다’로 시작하는 e-메일 한 통이 그의 시선을 끌었다. 비행단 장병들의 정훈교육을 담당하던 권 대위는 강연회 강사 설문을 한 결과 유홍준 선생을 모시자는 의견이 압도적이자 수십 명 병사들의 소감을 직접 첨부해 모시고 싶다는 뜻을 간곡하게 전했다. “군부대라서 강사료를 많이 드릴 수 없고, 강연 계획이 워낙 빡빡하신 것도 알지만 병사들에게 평생 통틀어 값진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진심으로 감사하겠습니다.”

 유 전 청장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가장 큰 감동은 나라사랑입니다. 유홍준 선생님 보고 싶습니다’(일병 박종윤), ‘이등병의 힘든 군 생활, 선생님 글을 읽고서 큰 포부를 품고 힘을 내고 있습니다’(이병 김진환) 같은 구절을 보니 안 갈 수가 없더라”며 꼭 40년 전인 1971년 입대해 35개월을 보낸 전방 군 생활이 겹쳐져 가슴이 뭉클했다고 털어놨다.

 “장병 여러분, 이제 왜 이 나라를 온 몸으로 지켜야 하는지 감이 오십니까?” 쏟아지는 박수를 받으며 유 전 청장이 강연을 마치자 가슴에 책을 안고 온 병사들이 길게 줄을 서 서명을 받느라 떠들썩했다.

공군 사상 첫 여성 전투기 조종사인 박지원(35) 소령은 “평소 애독자라 오늘 강연을 손꼽아 기다렸다”며 수줍게 악수했다. 염대찬(26) 대위는 “내가 지키는 이 나라가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한반도 문화의 독창성을 깨우쳐주신 유 선생님께 감사하다”고 말했다.

 유 전 청장은 “군에서 들려오는 사고·폭행·자살·탈영 같은 궂은 소식 말고 이렇게 문화 선봉으로서의 군대 얘기가 전국에 퍼지면 군에 자식 형제를 보낸 국민 모두가 행복해지는 것 아니겠냐”고 즐거워했다.

원주=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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