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더미 이탈리아 … 내각은 국민 무서워 재정개혁 거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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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현지시간) 프랑스 칸에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오른쪽)와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왼쪽)이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 앞서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총리(왼쪽 둘째)와 만나 재정위기 사태를 논의하고 있다. 가운데 뒷모습은 헤르만 반 롬푀위 유럽이사회 의장. [칸 로이터=뉴시스]

또 하나의 비수가 3일(현지시간) 실비오 베를루스코니(75) 이탈리아 총리에게 날아들었다. 그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참석차 프랑스 칸에 머물고 있었다. 비수는 흔한 성추문 폭로가 아니었다. 이탈리아 출신 마리오 드라기(64) 유럽중앙은행(ECB) 총재가 날린 것이었다. 드라기는 취임 사흘 만에 기준금리를 인하(1.5%→1.25%)하면서 이탈리아 국채 추가 매입을 사실상 거부했다.

 ECB의 국채매입 확대는 베를루스코니의 간절한 소망이었다. 글로벌 시장의 예상이기도 했다. 추가 매입을 기대할 만한 상황이었다. 그리스 국민투표 소동이 불거진 이달 1일 이후 유럽 채권시장에선 이탈리아 국채의 덤핑이 이어졌다. 이른바 ‘늑대 무리의 공격(울프팩)’이다. 헤지펀드들이 무리 지어 이탈리아 국채를 팔아치웠다는 얘기다. 그 결과 10년 만기 국채 수익률(시장금리)이 위험 수준인 연 6%를 돌파했다.

마리오 드라기 총재

 이런 이탈리아에 대해 드라기는 “ECB의 존재 이유는 중기(3~5년) 물가를 안정시키는 일”이라며 “국채 매입은 금융통화정책이 잘 통하도록 한시적으로 벌이는 개입”이라고 잘라 말했다. 이 발언의 후폭풍은 거셌다. 그리스의 국민투표 취소로 시장이 한숨을 돌린 이날 이탈리아 10년 만기 국채의 수익률은 고공비행했다. 사상 최고치(6.195%)나 다름없는 연 6.194%로 거래를 마쳤다. 한때 6.4% 선까지 올랐다. 채권 전문가들이 말하는 ‘마(魔)의 7%’가 지척이다. 유로존 국가의 10년 만기 국채 수익률이 그 선을 넘으면 ‘매수거부 사태(Buyers’ Strike)’가 일어난다. 실제로 그리스·포르투갈·아일랜드는 수익률이 연 7%를 넘어서자 얼마 버티지 못하고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서둘러 앙겔라 메르켈(57) 독일 총리와 니콜라 사르코지(56) 프랑스 대통령이 베를루스코니와 칸에서 회동했다. 하루 전인 2일 메르켈·사르코지가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59) 그리스 총리에게 “구제금융을 한 푼도 줄 수 없다”고 최후통첩할 때와 비슷한 분위기였다. 두 사람은 베를루스코니에게 “이제는 말로 재정개혁이나 긴축을 약속하는 것으론 어림도 없다”며 “약속을 철저히 이행해야 한다”고 압박했다.

 이탈리아 빚더미는 가공할 만하다. 이탈리아의 국가부채는 올 10월 말 현재 1조8995억 유로(약 2944조원)에 이른다. 이는 유로존 전체 국가부채의 23%다. 이런 이탈리아가 쓰러지면 사실상 구제가 불가능하다. 유럽재정안정기금(EFSF)이 1조 유로까지 증액될 예정이지만 이는 내년 중순 이후의 일이다. 발등의 불을 끄는 데 쓸 수 있는 돈이 아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베를루스코니 리더십도 “달걀 껍데기 같다”고 영국 가디언지는 평했다. 이날 로마에선 집권당 의원 6명이 성추문 등을 이유로 베를루스코니의 사퇴를 서면으로 요구했다. 이들은 “이달 8일로 예정된 예산안 표결에서 반대표를 던지겠다”고 공언했다. 하루 전인 2일엔 각료들이 베를루스코니가 제시한 재정개혁 계획에 반대했다. “경제침체 에 시달리는 국민에게 긴축하라고 설득하기 어렵다”는 이유였다. 사실상 궁정반란이었다. 다급해진 베를루스코니는 비상수단을 쓸 요량이다. 이날 로이터 통신은 “베를루스코니가 ‘15일 이내에 재신임을 묻겠다’고 메르켈·사르코지에게 약속했다”고 보도했다.

 한편 유럽연합(EU) 관계자는 4일(현지시간) 이탈리아가 연금 개혁 추진 상황에 대해 국제통화기금(IMF)과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 등의 감시를 받는데 동의했다고 밝혔다고 AFP 등 외신들이 전했다.

강남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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