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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뇌는 성능이 최고 … ‘이틀 전 일기’를 써서 기억력 약화만 막으세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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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2007년 97세를 일기로 타계한 금아(琴兒) 피천득 선생은 생전에 쓴 수필에서 “어느 나이든 살 만하다”고 결론 내렸다. 한·일 강제합병의 해에 태어나 식민지·동족상잔·경제개발·민주화가 날줄 씨줄로 얽히고설킨 민족 최대의 격동기를 견뎌낸 삶이 객관적으로야 어찌 ‘살 만했던’ 세월이었을까. 고인의 단아하고 격조 높은 성품과 인생관이 우러나는 말로 여겨져 나도 선생의 나이관(觀)을 닮고 싶어 했다.

 물론 말처럼 쉽지만은 않다. 한 달 전 고향의 어머니께 안부 전화를 했다가 작은 충격을 받았다. 올해 만 91세인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처음으로 “누구신가요”라고 묻더라는 것이다. 올 게 왔구나 싶었다. 부인을 못 알아보는 증세는 곧 사라졌지만 가족들은 여전히 긴장하고 있다. 나도 몇 년 전부터 사람 이름을 기억하는 데 지장받는다. 영화 ‘다이 하드’ 시리즈의 주연배우 이름(브루스 윌리스)을 되살리느라 종일 애태운 적도 있다. 분명 ‘부’씨(氏)인 것까지는 맞는데 그렇다고 제주도 사람일 리는 없고… 하는 식으로 헤맸다.

 뇌의 노화는 대개 고유명사를 잊는 것으로 시작된다. 중년의 뇌는 가장자리부터 닳기 시작한다. 가장자리에 저장된 것이 바로 브루스 윌리스 같은 이름들이다. 얼굴은 또렷하게 기억나는데 유독 이름만 혀끝에서 맴도는 것을 ‘설단(舌端·tip of the tongue) 현상’이라 한다. 그러나 기억하려고 애쓰는 한 치매는 아니다. 치매는 아예 기억할 필요조차 못 느끼는 질병이니까. 그래도 사람 이름을 기억 못하면 일상생활에서 여러 가지 곤란이 닥친다. 그런 분들께 일본 NHK 교육방송의 인기 강사 시라사와 다쿠지 박사가 권한 방법 하나를 권한다. “이틀 전 일기를 쓰라”는 것이다. 뇌에는 단기기억과 장기기억이 있는데, 나이 들면 단기기억을 장기기억으로 바꾸는 능력이 떨어진다. 그래서 당일 말고 이틀 전 일기를 쓰는 습관을 들여 기억력 약화를 늦추는 것이다(『100세까지 노망들지 않는 101가지 방법』·분슌신서).

 더 희망을 주는 사실이 있다. 인지 속도와 고유명사 기억을 제외하면 중년의 뇌는 생애에서 가장 뛰어난 성능을 발휘한다. 특히 종합적인 판단력, 옳고 그름과 일의 성패(成敗) 여부를 한눈에 알아보는 지혜, 재정 면의 판단력은 중년이 최고다. 게다가 평균수명이 늘어난 요즘 대다수 연구자는 ‘중년’을 40~68세로 정의한다. 뉴욕 타임스 의학전문기자 바버라 스트로치가 많은 과학자를 인터뷰한 결과다(『가장 뛰어난 중년의 뇌』). 대한민국 중년들이여, 부디 힘을 내시길.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취업난·육아난에 시달리는 20~30대가 이런 주장조차 ‘중년 이후 기득권 세대의 음모’라고 오해할지 모른다는 점이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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