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드라인 몰린 한·미 FTA 비준 … 무기력하게 끌려다닌 168석 한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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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 국회에서 열릴 예정이던 한·미 FTA 핵심쟁점 끝 장토론이 민주당 정동영 최고위원과 민주노동당 이정희 대표 등의 불참으로 무산됐다. 앞쪽에 발언시간 제한용 시계가 보인다. [변선구 기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안이 정부가 설정한 ‘데드라인’까지 내몰렸다. 정부는 한·미 FTA가 내년 1월 1일부터 시행되려면 10월 31일까지는 비준안이 처리돼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이에 따라 10월 국회의 마지막 날 한나라당은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비준안 처리를 다시 시도한다.

 그러나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 참패 이후 ‘단독 처리’나 ‘날치기’라는 여론의 비판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한나라당은 30일 하루 종일 ‘좌고우면(左顧右眄·앞뒤를 재고 망설여 일을 결정짓지 못함)’했다. 그렇다고 민주당이 민노당과 진보 시민단체의 입장과 배치해 찬성 쪽으로 당론을 바꾸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FTA 찬성은 ‘야권통합’이란 내년 대선의 핵심전략을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설령 민주당 ‘협상파’가 한나라당의 양보를 전제로 비준안을 통과시키려 한다고 하더라도 상황이 녹록한 건 아니다.

 30일 국회에서 FTA 핵심 쟁점인 투자자국가소송제(ISD)에 대한 ‘끝장토론’이 불발로 끝난 건 소수야당에 끌려다니는 민주당 현실을 그대로 보여줬다. 당초 토론 참여의사를 밝혔던 민주당 정동영 최고위원과 이정희 민노당 대표 등 야당 측 패널들은 돌연 공동으로 토론을 보이콧했다. 토론장에 들어와 있던 국회 외통위 민주당 간사인 김동철 의원은 기자들이 끝장토론 무산 배경을 묻자 “누가 (무산됐다고) 그랬어요? 정동영 ‘민노당’ 의원이요?”라고 반문했다. 농담조였지만 민주당·민노당 등의 야권 공조로 외통위 차원의 FTA 논의가 자꾸 파행하고 있는 데 대한 ‘뼈 있는’ 농담이었다.

 정 최고위원과 이 대표는 공동으로 기자회견도 열었다. 정 최고위원은 ISD와 관련, “(미국) 월가 투자자들이 자신들의 소유권을 보장받기 위해 ‘권리장전’으로 고안한 꼼수이자 월가의 늑대소송제”라며 “(이를 국민이 알려면) 반드시 생중계하는 가운데 토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대표도 “토론의 전제조건이 생방송 중계였으나 녹화 후 심야시간에 방송된다고 한다”며 “한나라당은 공중파 생중계를 관철시키라”고 요구했다.

 회의장에서 정 최고위원 등을 기다리던 한나라당 소속 남경필 외교통상통일위원장은 “생중계를 할 건지 말 건지는 방송사 고유권한”이라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국민과 국회를 조롱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민주당·민노당·진보신당·국민참여당·창조한국당 등 야5당은 31일 국회에서 합동 의원총회를 열어 비준안 저지 전략을 논의한다. 민주당 김유정 대변인은 “한나라당이 날치기를 하면 야당은 죽기 아니면 살기로 막겠다”고 밝혔다.

 이런 상황에서 한나라당은 무력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외통위 한나라당 간사인 유기준 의원은 “당 지도부가 최대한 빠른 시일 내 FTA를 처리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원내 지도부는 처리 시점을 못박긴 어렵다는 입장이다. 익명을 요구한 재선 의원은 “168석이나 되는 여당이 언제까지 이렇게 무력하게 끌려다녀야 하느냐”고 개탄했다.

 조동근 명지대 교수(경제학)는 “이미 충분한 시간을 비준안에 합의하는 데 쏟은 만큼 ‘자유 투표’를 통한 처리를 추진해야 한다. 언제까지 시간만 끌 생각이냐”고 했다.

글=조현숙·강기헌 기자
사진=변선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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