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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파도 막아낸 인천 꼴망파 건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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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1987년 4월 8일 인천 중구 항동의 동아양복점에 토착 폭력조직 꼴망파 행동대원 18명이 들이닥쳤다. 회칼 등으로 무장한 이들은 호남 출신 폭력조직인 선장파의 아지트인 이곳을 순식간에 유린하면서 인천 토착 주먹의 성가를 높였다. 당시 꼴망파의 두목 최모씨는 인천에 진출하려는 타 지역 출신 ‘주먹’들을 평정, 인천 주먹계의 대부로 부상했다. 지역 주먹계의 한 증인은 “김태촌의 서방파도 당시 전국으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인천에 진출하려 했으나 최씨에 의해 두 차례나 막혔다”고 전했다.

 호남파 습격 1년 전에 벌어진 서방파의 인천뉴송도호텔 습격 사건도 인천 주먹은 아니었지만 인천에 조폭 이미지를 덧씌웠다. 86년 7월 26일 오전 4시30분쯤 김태촌으로부터 “다리를 부러뜨려 놓으라”는 지시를 받은 3명의 서방파 행동대원이 호텔에 들이닥쳤다. 이들은 호텔 나이트클럽 사장 황모씨의 객실을 습격, 낫과 곡괭이를 휘둘렀다.

 이처럼 인천 조폭계는 뿌리가 깊다. 지난 21일 밤 출동한 형사들 앞에서 조폭끼리 난투극을 벌인 것도 인천 조폭계의 영토 확장 싸움이 원인이다. <본지 10월 24일자 2면>

경찰은 현재 인천에 13개 조직, 278명의 조직폭력배들이 활동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70∼80년대와 비교하면 규모가 줄었지만 아직도 인천 조폭은 무시 못할 세력”이라고 말했다. 일제강점기 때 인천은 같은 개항 도시인 부산·목포 등에 비해 깡패나 조폭의 횡포가 적었다. 향토사학자 조우성씨는 “일제가 인천을 병참기지화하면서 노동쟁의나 범죄를 막기 위해 헌병·경찰의 2중 치안체계를 구축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국전쟁과 산업화로 외지인의 이주가 늘면서 인천 조폭도 성장했다. 경찰 관계자는 “80년대까지만 해도 부산·목포 지역과 함께 인천 조폭 세력도 전국적인 명성을 떨칠 정도로 강력했다”고 말했다. 90년 노태우 정권 시절 펼쳐진 ‘조폭과의 전쟁’으로 인천 조폭은 약해졌다. 2009년 6월에는 이 지역 조폭의 대부였던 꼴망파 두목 최씨가 사행성 오락실을 운영한 혐의 등으로 구속되면서 조폭 세력은 위축됐다.

 최근 들어 조폭들이 다시 활개 치는 것은 인천의 대규모 개발 바람과 맞닿아 있다고 보고 있다. 인천에서는 송도·청라·영종 경제자유구역을 중심으로 대규모 건설 프로젝트와 구도심 재개발 사업이 진행 중이다. 지난 4월 인천경찰청 인근 로데오거리에서 조폭끼리 유흥업소 이권을 둘러싸고 흉기와 야구방망이를 휘두르는 난투극을 벌인 것도 개발 이권 때문이다. 시민들은 “조폭끼리 이권 다툼이 치열해질수록 시민들은 불안한데 경찰은 뭘 하는지 모르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번 심야 유혈 난투극과 관련, 경찰의 대응도 도마에 올랐다. 난투극을 지켜본 시민들 사이에서는 “처음 출동한 경찰들은 경찰차 안에서 경고방송만 하고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는 말이 돌고 있다. 인천 경찰이 이번 사건을 축소 보고한 정황도 속속 나오고 있다. 조현오 경찰청장은 24일 “단순 우발 충돌로 보고를 받았는데 언론 보도를 보고 나서 칼부림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뒤늦게 수사에 나선 인천경찰청은 24일까지 유혈 난투극을 벌인 신간석파와 크라운파 조직원 24명을 검거했다. 경찰청은 24일부터 12월 말까지를 조직폭력 특별단속 및 일제점검 기간으로 정하고 지방청 광역수사대에 조폭 전담수사팀을 편성해 집중 단속에 나서기로 했다.

인천=정기환 기자

◆꼴망파=인천 최대 폭력 조직 . 2009년 구속된 두목 최모씨의 별명인 ‘꼴망’에서 비롯됐다. 꼴망의 정확한 뜻은 알려지지 않았다. 현재도 부평신촌파와 함께 인천 양대 조직이다. 경찰은 꼴망파의 핵심 조직원이 40명 이상일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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