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한 19세 시민군, 카다피 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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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시민군에게 끌려가고 있는 카다피. 그는 이 직후 총에 맞아 숨졌다. 카다피는 모발이식을 한 상태였다. [AP=연합뉴스]

누가 리비아의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Muammar Qaddafi·69)에게 총을 쐈을까. 카다피의 죽음을 둘러싸고 논란이 증폭되고 있다. 21일(현지시간) AP통신 등 외신들은 리비아 과도국가위원회(NTC)의 마무드 지브릴 총리의 말을 인용해 “카다피가 시르테에서 생포된 뒤 그의 친위대와 시민군 간 총격전이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카다피가 머리에 총을 맞아 숨졌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시민군 측이 의도적으로 카다피에게 총격을 가했는지 총격전 중 우연히 총에 맞았는지 정확한 경위는 즉각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일본 TV아사히는 이날 “시민군 소속의 19세 병사가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카다피를 본 순간 분노가 치밀어 나도 모르게 방아쇠를 당겼다. 충동적으로 쐈다’고 증언했다”고 보도했다. 독재자에게 분노를 느낀 한 시민군이 포로가 된 카다피를 발견한 순간 저격했다는 것이다. 카다피가 사망한 20일 하루 동안 그의 행적을 재구성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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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다피는 20일 오전 은신처인 시르테가 시민군에 함락되기 직전 측근 및 친위대 병사들과 함께 호위차량 100여 대에 나눠 타고 탈출을 시도했다. 이를 전달받은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는 무인 폭격기와 프랑스 미라주 2000 전투기를 출동시켰다. 전투기들은 카다피 일행을 멈추기 위해 선도차량에 위협 사격을 가했다. 하지만 카다피 일행은 이를 무시하고 전속력으로 달렸다. 이에 전투기들은 호위차량에 폭격을 가했다. 15대가량이 화염에 휩싸였으며 50여 명이 숨졌다.

 피격을 가까스로 피한 카다피는 차에서 내려 인근 고속도로 밑에 있는 땅굴 모양의 콘크리트 배수관에 몸을 숨겼다. 하지만 곧바로 시민군에게 발각됐다. 카다피는 “제발, 쏘지마. 쏘지마”를 외쳤고, 시민군은 카다피의 권총 지갑에 있던 황금권총을 빼앗은 뒤 그를 체포했다. 현장에 있던 시민군은 “카다피가 ‘뭐가 잘못된 거야. 어떻게 돼 가고 있는 거야’라고 소리쳤다”며 “그는 다리와 등에 부상을 입었지만 심각하진 않았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미국 폭스뉴스는 새로 공개된 동영상에서 카다피가 20일 시민군에 체포돼 길거리로 끌려나가면서 “지금 당신들 행동은 잘못된 것이다. 뭐가 옳고 그른지 아느냐”고 말했다고 21일 보도했다. 카다피는 당시 여러 차례 “당신들이 저지르고 있는 짓은 이슬람 율법으로 금지된 것”이라고 하자, 한 시민군이 “닥치라”고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카다피는 이같이 말하며 살려줄 것을 간청했다고 폭스뉴스는 전했다.

논란이 일고 있는 것은 이후 상황이다. 카다피는 시민군에게 이끌려 트럭으로 이동하는 동안 피를 흘리면서 비틀거리긴 했지만 스스로 걸음을 걸었다. 그가 시민군에게 둘러싸여 얼굴 등을 구타당하면서 이송 차량에 거의 다다랐을 때 약간 떨어진 곳에서 연속적인 총소리가 울려 퍼졌다. 바로 이 순간 옆에 있던 병사 한 명이 카다피의 머리에 권총을 쐈고 그는 숨졌다.

피격 당시 카다피의 주변에선 “그를 살려 줘라. 생포해라”라는 외침도 있었다. 시르테 인근 도시인 미스라타로 이송된 카다피의 시신을 부검한 의사는 “복부의 관통상과 머리의 총상이 치명적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카다피가 모발 이식을 한 사실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지브릴 NTC 총리의 주장은 카다피 친위대와 시민군 간 교전이 벌어졌을 때 카다피가 총을 맞았다는 것으로 현장 증언과는 다르다. 누가 총을 쐈는지도 언급하지 않았다. AP통신 등 외신들은 “카다피가 옆에 있던 누군가에 의해 총에 맞았던 만큼 시민군이 의도적으로 그를 살해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전했다. 미 CBS 방송은 한 시민군 병사를 인용해 “카다피의 생포를 막기 위해 그의 경호원이 카다피의 가슴에 총을 쐈을 수도 있다”고 보도했다. 로이터통신은 NTC 관계자를 인용해 “카다피는 생포된 뒤 끌려 가는 동안 구타당해 죽었다”고 전했다. 이처럼 증언이 엇갈리면서 카다피의 실제 사망 경위는 수수께끼로 남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로이터 통신 등은 “카다피의 생포 당시 현장이 제대로 통제되지 않았던 만큼 누군가가 고의 또는 우발적으로 그를 살해했을 가능성이 있다”며 “관자놀이 한가운데에 정확히 총을 맞은 것으로 볼 때 고의성이 다분하다”고 분석했다. 또 “NTC가 카다피의 사망 경위에 대해 모호하게 발표한 것은 시민군이 그를 죽였을 경우 불법 처형이라는 비난을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나비 필레이 유엔 인권최고대표는 "카다피의 죽음을 둘러싼 상황이 불확실해 조사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NTC는 “카다피의 장례식은 며칠 후 비밀리에 실시될 것”이라며 “정확한 진상 규명을 위해 국제형사재판소(ICC)의 조사가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카다피의 4남 무타심과 측근인 아부 바크르 유니스 전 국방장관도 이날 시르테에서 사망했다. 한편 NTC는 20일 ‘리비아 해방’을 공식 선언하고 새 정부 구성을 위한 본격적인 작업에 착수했다. 카다피의 최후 거점인 시르테를 장악함으로써 8개월에 걸친 리비아 내전도 사실상 마무리됐다.

최익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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