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처럼 피어난 아이들의 웃음소리 담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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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맣게 잊고 지냈던 어린 시절, 흑장미 빛 할미꽃이 산소 가에 핀다는 얘기를 듣고 할미꽃으로 가던 손길이 주춤했던 사람들은 알 것입니다. 으스스한 기분이 들어도 할미꽃을 바라볼 수 있던 그 시절이 눈물겹게 그립다는 것을요. 따사로운 가을 햇살 아래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하나 되어 학교 운동회를 했던 사람들은 알 것입니다. 오재미 던지며 '와∼와∼' 누가 먼저 박 터뜨리나 기를 쓰면서 온종일 마음껏 웃고 떠들던 그 시절이 얼마나 소중했는지를요.

모든 아름다운 것은 사라지게 마련인가요? 아름답고 소중한 것이 우리 손에서 영원히 빠져나가는 것을 지켜보기만 해야 하나요? 이렇게 체념하기에는 소중한 것에 대한 기억이 너무나 생생합니다. 〈소중한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마가을)는 그 아름다운 기억에 담긴 삶의 명백한 진실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녹색연합에서 펴내는 월간지 '작은 것이 아름답다'의 기자들이 전국 구석구석에 없는 듯 있는 분교를 돌아다니며 이곳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을 한 권의 책에 담았습니다.

60년대 교육입국의 기치 아래 전국의 벽지에 세워졌던 분교들이 자본의 논리 아래 하나 둘 폐교하고 있습니다. 자연을 바라보면서 세상과 사람살이의 이치를 깨우쳐가던 아이들이 먼지 풀풀 날리며, 또는 꽁꽁 언 땅을 힘차게 내디디며 놀던 운동장이 하나씩 폐허로 바뀌었습니다. 맑디맑은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기억 저편에 담은 채 황폐한 땅으로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학생 수가 적어 축구를 하더라도 한 명이 아쉬운 곳, 화내고 싸워도 금방 웃고 친해지는 아이들, 그래서 '왕따'가 존재할 수 없는 학교. 엄마, 아빠가 보고 싶다며 눈물을 내비쳐서 선생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도 하는 아이들. 남해 미남분교의 다섯 아이들, 상욱이, 현욱이, 상곤이, 성근이, 행곤이는 모두 부모님이 없습니다.

저마다 삶의 무게를 지니고 살아가지만 이들이 꽃처럼 활짝 웃을 수 있는 것은 산에 강에 들에 핀 찔레꽃이 있기에, 이들을 보살펴주는 친구 같은 선생님이 있기에, 이 아이들이 마음껏 뛰놀 수 있는 학교 운동장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축구 잘하는 상곤이가 운동장이 좁아라 뛰어다녔던 미남분교는 결국 1999년 3월 1일 폐교했습니다. "이제 학교가 없어지믄 마을은 적막강산이제…"라는 동네 어른들의 안타까움을 뒤로 한 채.

충남 금산군 건천분교는 전교생이라고 해 봐야 5학년 시내와 3학년 미림이 두 명이 전부였습니다. 둘만 있으니 서로 싸울 일도, 화낼 일도 없습니다. 시내는 미림이에게, 미림이는 시내에게 벗이며 스승이고 언니며 동생인 셈이죠. 둘만 앉은 교실이 너무 넓은 건 아닌가 싶을 때도 있지만, 김장수 선생님 넉넉한 마음으로 채우고도 남습니다.

그러나 지금, 건천분교의 문은 굳게 닫혀 있습니다. 99년 9월 진산초등학교로 옮긴 미림이는 버스를 타고 지나다니면서 늘 생각한답니다. 저 혼자 외로이 서 있는 학교가 안쓰럽고 불쌍하다고. "동물들이 학생이 되어 주었으면, 정말 그랬으면 학교가 문 닫지 않아도 됐을 건데" 하면서 그 시절을 그리워한답니다.

기자들이 1년여에 걸쳐 산과 바다를 건너 10개의 분교를 찾아 다니는 동안에 폐교한 학교도 3곳이나 됩니다. 남해 미남분교의 상곤이도, 죽변 화성분교의 개구쟁이 준재도, 금산 건천분교의 꼬맹이 미림이도 이제 더 이상 나무와 바람과 하늘을 친구 삼아 운동장을 뛰놀 수 없습니다. 이 아이들은 '학생 수가 적어 제대로 된 교육을 할 수 없다'는 교육부의 미명 아래 몇 리 길을 걸어가야만 하는 읍내 학교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영원히 '선생님'으로 남고 싶다는 '섬진강 시인' 김용택 님은 〈촌아 울지마〉(열림원, 2000년)에서 당신이 직접 맡고 있는 마암분교 아이들의 모습을 따뜻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입학할 때가 아직 안 됐는데도 늘 학교에 나와 수업을 방해하던 '가짜' 다희와 창우. 할아버지 할머니랑 살다가 얼마 전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곧잘 울던 은미, 유일한 놀이가 낚시이고 유일한 친구가 물고기인 섬진강댐 호숫가에 사는 귀봉이, "사람들이 모두 도시로 가면 쓸쓸해진 촌이 운다"며 "촌아 울지마" 하던 초이. 꽃처럼 환하게 웃는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김용택 님은 "저 아이들이 내 가슴에 담겨지면 나도 꽃이 되리"라고 말합니다.

자연 속 아이들의 화려한 풍경을 지워가는 문교 정책에 대한 김용택 님의 분개는 사진작가 강재훈 님에게서도 찾아집니다. 사진집 〈분교-들꽃 피는 학교〉(학고재, 1998년)에 강재훈 님은 전국의 산간 벽지 도서에 흩어져 있는 분교와 이곳 아이들의 모습을 곱게 담았습니다.

'산이 깊어도 산 깊은 줄 모르고, 뱃길이 멀어도 갈매기 소리에 외로운 줄 모르는 그 아이들만의 이야기를 사진작업으로 남겨야 한다'는 생각으로 강재훈 님은 2년 넘게 밀양 천황산의 고사리학교 등 폐교 위기에 처한 오지 분교를 찾아다닌 거죠. 가난하지만 희망을 잃지 않는 들꽃 같은 아이들의 웃음소리까지 렌즈에 담아낸 것이죠.

지난 3월 강재훈 님은 자신이 직접 글을 쓰고, 또 자신이 촬영한 사진을 삽화가 김영곤 님이 세필화로 다시 그려 어린 아이들이 볼 수 있게 만든 책 〈작은 학교 이야기〉(진선출판사)를 펴내기도 했지요. 모두가 우리 곁에서 사라져가는 아름답고 소중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진정한 교육은 몇 천만원짜리 과외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을 바라보면서 타인에게 마음 열기를 배우고 '놀이가 공부이고 공부가 놀이'인 작은 학교에서의 교육이 참교육이라는 사실을 정치인들만 모르고 있는 셈이죠.

승진을 위해 0.1점에 연연하고 공부 잘하는 아이만 편애하는 선생님이 아니라 똥물에 빠져 구더기를 뒤집어쓴 아이를 씻겨주는 여주 주암분교의 양해남 선생님(〈소중한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137쪽 참고) 같은 분이 있기에 작은 학교에 우리 교육의 미래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전봇대 밑에 떨어진 죽은 참새를 보며 우는 아이들을 지켜줄 수 있을 때, 소중한 것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면 촌이 우는 일도 더 이상 일어나지 않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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