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득 4만 달러 … 울산 늙어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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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오후 오토바이를 타고 퇴근하는 현대중공업 근로자들. 절반가량이 50대 이상으로 보였다. 이 회사 근로자들의 평균 연령은 48세. 매년 600명 선이던 정년퇴직자 수가 지난해 950명으로 급증했다. [송봉근 기자]

13일 오후 울산 현대중공업 조선 야드. 점심을 마친 근로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최근 발행된 노조 소식지 ‘민주항해’를 돌려보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소식지 1면에는 ‘퇴직지원제도 마련, 더 이상 늦출 수 없다!’는 제목이 큼지막하게 박혀 있었다. ‘무더기 정년 퇴직이 임박했는데 대다수가 제대로 준비를 못 하고 있다. 노조가 퇴직지원제도 구축에 적극 나설 것’이란 내용이었다.

 “집 사고 부모·자식 부양하기 바빠서 노후대책을 마련하지 못해 걱정이야. 집을 팔 수도 없고, 재취업도 어렵고… 황혼이혼 당할까봐 겁나.”(50대 근로자 김모씨)

“여기 좀 봐. 구체적인 퇴직 계획 세워놨다는 사람이 5.9%뿐이라잖아. 한때 가장 흥청댔던 도시 울산이 늙어가는 거야. 노조도 정년 퇴직하는 조합원들을 위한 대책을 내놔야 한다니까.”(50대 근로자 박모씨)

 이들은 점심시간 내내 노후대책 얘기만 하다 작업에 복귀했다. 인구 113만 명에, 사업체 수 6만8600개, 취업 근로자만 53만4000명(지난해 기준)에 달하는 산업도시 울산. 1인당 지역내총생산(GRDP)은 3만6870 달러(약 4700만원, 2009년 기준)로 전국 최고다. 젊고, 역동적이고, 그래서 노조의 투쟁도 격렬했던 도시가 울산이었다.

 이 도시가 변하고 있다. 정치 이념·임금 인상 투쟁에 골몰하던 울산지역 노동계의 이슈는 조합원의 퇴직 대비책 마련 쪽으로 옮아가고 있다. 고령화가 원인이다. 취업 인구의 주축인 베이비붐 세대(1955~64년생)의 정년이 임박하면서 앞으로 5년쯤 후부터 정년 퇴직자가 매년 1만 명 이상 쏟아질 전망이다. 2000년만 해도 울산지역 취업 인구 중 50~59세는 4만7000명(전체 취업 인구의 10.7%) 수준이었다. 5년 후인 2005년에는 50대 취업자 수가 7만3000명(14.8%)으로 늘었다. 지난해에는 이 수치가 10만6000명(19.9%)으로 치솟았다. 대부분의 직원은 정년을 앞두고 노후 대책을 걱정한다. 현대자동차·현대중공업에서만 올 한 해 1178명이 정년 퇴직한다. 그래서 도시는 활기를 잃어가고 있다.

 울산대 전성표(사회과학부) 교수는 “울산시의 인구 구성과 연령별 취업자 숫자를 감안할 때 올해 정년 퇴직자는 6900명에 이르고, 2016년에는 1만 명을 넘어 1만2400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됐다”고 말했다.

그는 “울산에 정착한 베이비붐 세대가 강력한 노조를 등에 업고 그동안 퇴출당하지 않고 일자리를 고수한 결과 한꺼번에 정년 퇴직에 몰렸다”고 말했다.

 울산 전체 취업자의 9.4%를 차지하는 현대차(울산공장)·현대중공업에서 2007년에 정년 퇴직한 근로자 수는 748명이었다. 현대중공업과 현대자동차의 정년은 59세다(58세 정년+1년 계약 연장). 정년 퇴직자는 2014년에는 1522명, 2017년에는 2001명으로 치솟게 된다. 베이비붐 세대 근로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현대차가 40%, 중공업은 54%나 된다.

 회사 측은 이들이 퇴직하면 젊은 직원을 채용하면 되지만 노조는 입장이 다르다. 노후대책이 불안한 조합원들이 노조에 ‘은퇴 후 대책’을 마련하라고 압박하고 있어서다. 고용지원 전문업체인 ㈜좋은일자리가 지난 8월 향후 7년 안에 정년 퇴직할 현대중공업 근로자 2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94%가 ‘회사 및 노조가 퇴직 준비 프로그램을 제공해야 한다’고 답했다. 이들은 재취업에 강한 집착을 보였다. 임금이 낮아도 취업하겠다는 사람이 69.2%였다.

 노사는 이런 요구를 받아들여 대응책 마련에 애쓰고 있다. 아직은 걸음마 수준이지만 재취업을 위한 재교육 등을 할 계획이다. 현대중공업 노사는 상설 퇴직지원센터 설립에 나섰다. 퇴직 5~10년 전부터 심리상담과 재취업·취미 교육 및 알선, 부부 합동의 생애설계 프로그램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오종쇄 노조위원장은 “퇴직자 위주의 사회적 기업을 설립하는 방안을 회사 측과 논의 중”이라고 말했다. 현대차는 이미 올해 초 ‘고령화대책 노사공동연구팀’을 구성, 정년 퇴직자 자녀 채용 우대제를 도입하기로 했다.

 이달 말과 다음 달 초로 예정된 현대차와 현대중공업 노조위원장 선거에 출마한 후보자들도 조합원의 은퇴 대책과 관련한 공약을 우선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울산고용센터 유승동 과장은 “늘어난 고령 조합원들의 표심이 선거 결과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이번 선거에서는 누가 노조원의 마음을 파고드는 은퇴 후 대책을 내놓느냐로 승패가 갈릴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조합원이 고령화할수록 노조의 임금·정치 투쟁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울산=이기원 기자
사진=송봉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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