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호의 지구촌 NGO 테마 탐방 ⑧ 미국의 AmericaSpeaks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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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11월 28일 미국의 수도 워싱턴DC에 있는 DC대학 강당에 아침부터 시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새로 취임한 앤소니 윌리엄스 시장이 제안한 새해 예산안에 대해 시민들의 목소리를 듣고 반영하기 위해서였다. 오전 10시쯤이 되자 강당은 약 3000명의 시민들로 가득 찼다. 흑인·백인·히스패닉계 등 다양한 인종의 젊은이부터 노인까지 고른 연령층, 그리고 남·녀 성비 균형까지 고려해 워싱턴 DC 당국이 배심원 방식으로 선발한 사람들이었다.

개회식이 끝나자 10~12명씩 둘러앉은 수백 개의 테이블에선 선정된 주제별로 참가자들 사이에 열띤 토론이 이어졌다. 그리고 한 주제가 끝날 때마다 전체 테이블의 의견이 집계돼 무대 위 대형스크린에 비춰졌다. 이어 참가자들은 배부 받은 휴대용 전자패드를 눌러 즉석 투표를 해 의견을 모았다. 이어 2차, 3차토론이 이어졌다. 이렇게 이틀간 진행된 토론이 마침내 종료되고 최종 결과가 스크린에 뜨자 행사장은 환호로 뒤덮였다.

1999년 11월 AmericaSpeaks가 3000여 명의 시민대표들이 참가한 가운데 워싱턴 DC의 새해 예산을 결정하는 21세기 마을회의를 진행하고 있다. 아래 사진은 회의에서 예산안을 진지하게 따져보고 있는 시민대표들 모습. [사진=AmericaSpeaks 제공]


“시민 여러분, 고생하셨습니다. 여러분들께서 제안하신 내용을 내년 전부 그대로 반영하겠습니다.” 행사장에서 내내 자리를 함께 했던 윌리엄스 시장과 공무원들이 예산 반영을 약속하자 분위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이날 시민들의 제안에 따라 워싱턴DC는 2억7000만 달러를 교육부문에 추가 배정키로 했다. 그리고 노인복지사업에 1000만 달러, 주택에 추가 2500만 달러, 청소년 범죄예방에 2000만 달러 등등을 새해예산에 반영키로 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미국발 ‘직접 민주주의’ 실험이 심상치 않은 속도로 미국, 나아가 지구촌에 확산되고 있다. 워싱턴DC의 사례처럼 시민들이 대규모로 나서서 정부나 지자체의 정책의제 설정과 예산배분에 직접 관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실험의 중심에 ‘21세기 타운미팅(Town Meeting·마을회의)‘이라는 직접 민주주의 방식을 개발한 AmericaSpeaks(아메리카스피크스)라는 한 NGO가 있다.

1995년 워싱턴DC에서 출범한 이 단체는 설립 이후 미국의 연방정부, 또는 지자체들과 함께 시민들이 정책수립에 직접 참여하는 운동을 펴고 있다. 마치 100~200년전 건국 초기 미국인들이 시 청사에 모여 직접 의견을 냈던 것과 같은 방식을 통해서다. 지난 10여 년간 미 50개 주에서 주 및 시 정부와 함께 모두 13만 명이 참가하는 50회의 크고 작은 타운미팅 행사가 있었다. 워싱턴DC만 해도 1999년부터 6년간 모두 일곱 번의 행사에 1만3000여 명이 참가했다.

이 AmericaSpeaks의 타운미팅 방식은 때론 그 규모가 상상을 초월한다. 1998년 퓨 체리터블 재단의 지원으로 2년간 미국 전역에서 실시한 미국 사회보장제도 개선 대토론회에는 무려 4만5000명이 참가했다. 또 2002년 9·11사태로 무너진 뉴욕시의 그라운드 제로 지역 재개발을 위해 뉴욕시가 시민과 함께 연 토론회 ‘7월포럼’에는 5000여 명의 시민과 900여 명의 회의보조 자원봉사자들이 참가했다. 2006년과 2007년에는 4000여 명의 뉴올리언스 시민이 참가한 가운데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무너진 뉴올리언스시 재건을 위한 마을회의를 열었다.

미국내 뿐 아니다. 호주·영국·크로아티아·스위스·헝가리·이탈리아·남아공 등 유럽·아시아·아프리카의 많은 나라들로 AmericaSpeaks의 타운미팅 방식이 확산돼 가고 있다. 이 단체는 2009년 7월에는 유엔환경프로그램(UNEP)과 함께 우리나라 대전시에서 전세계 110개국 청소년 700명이 화상으로 참가하는 지구촌청소년정상회의(Global Youth Summit)를 열기도 했다.

AmericaSpeaks는 현 회장이기도 한 캐롤린 루켄스마이어라는 한 여성의 아이디어로 시작이 됐다. 10년간 공직생활을 하던 그녀는 퇴임 후 미국 전역을 여행하던 중 각종 공공정책 수립에 정작 당사자인 국민들이 배제되고 있음을 보고 AmericaSpeaks를 시작했다. 워싱턴DC의 한 빌딩에 사무실을 임대해 사무국을 차렸다. 직원은 불과 10여명 남짓이다.

“이 단체가 가능했던 것은 무엇보다 시대적 욕구가 있었기 때문이지요. 거기에 전자투표 장비 같은 최첨단 기술을 활용한 것이 주효했습니다.”

AmericaSpeaks의 회장 비서인 에릭 다이터(28)는 “옛날의 타운미팅을 IT를 활용한 현대식으로 부활하자는 아이디어 하나로 시작된 NGO활동이 시대의 욕구와 맞아 이 같은 전국 활동으로 발전했다”고 말했다.

정치인이나 공무원이 아닌 국민이 직접 정책을 수립하겠다는 ‘직접 민주주의’ 운동. “미국이 말한다”(AmericaSpeaks)는 한 NGO에 의해 시작돼 현재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이창호 중앙일보 시민사회환경연구소 전문위원, 남서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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