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시대 못 따라간 ‘왕년의 대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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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11일 오후 3시 충북 영동군 경부고속도로 황간휴게소에 낡은 소형차 한 대가 들어섰다. 차 안엔 지난달 이봉서(75) 전 상공부 장관의 서울 성북동 자택을 턴 혐의로 경찰의 추적을 받고 있던 정모(57)씨가 타고 있었다. 정씨는 최근 잇따른 성북동 고급 주택가 연쇄 절도 사건의 용의자로 자신이 지목됐다는 걸 알면서도 휴대전화를 끄지 않았다. 이 때문에 경찰은 위치 추적에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 정씨의 행방을 알아낼 수 있었다. 정씨는 결국 이 휴게소로 뒤쫓아온 경찰관들에게 체포됐다.

 경찰 관계자는 정씨를 “디지털 시대의 대담한 구식 도둑”이라고 평했다. 사건에 대한 언론 보도가 나온 뒤 경찰이 자신을 쫓고 있다는 걸 예상할 수 있었는데도 휴대전화를 계속 사용했기 때문이다. 또 얼굴을 제대로 가리지 않은 채 범죄 현장을 돌아다녔다. 사건 발생 시간 전후로 이 전 장관 집 주변을 돌아다니는 정씨의 얼굴이 폐쇄회로TV(CCTV)에 그대로 잡힌 것이다. 경찰은 “범행 수법도 정씨가 14년 전 벌였던 것과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범행 대상으로 잡은 주택에 사는 가족들이 집을 비운 시간을 골라 몰래 물건을 훔쳐 나오는 방식이다. 정씨는 1997년 성북동·한남동 고급 주택가에서 절도 행각을 하고 해외로 도피했다가 2006년 검거돼 징역형을 선고받은 뒤 3개월 전 출소했다.

 정씨는 경찰에서 자신의 혐의를 모두 부인하고 있다. 정씨는 또 “죄를 지었다면 휴대전화를 켜고 다녔겠느냐”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 관계자는 “체포 후 혐의를 부인하는 것도 지난 범죄 때와 똑같다”며 “정씨의 이동경로와 피해자 진술 등을 토대로 혐의를 입증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사건을 맡고 있는 서울 성북경찰서는 12일 정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경찰은 또 지난달 국민대 한종우(79) 재단이사장의 성북동 자택에 들어가 물건을 훔치려다 미수에 그치고 달아난 혐의를 받고 있는 전모(60)씨도 이날 붙잡았다.

최선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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