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들도 전세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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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10억원. 서울 강북지역에서 165㎡(옛 50평)대 아파트를 살 수 있고 집값이 비싼 강남에서도 웬만한 99㎡(옛 30평)대 집값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정부의 고가주택 기준(9억원)보다 많은 돈을 전셋값으로 내고 남의 집에 세를 사는 사람이 늘고 있다. 주택시장 침체에 따른 전세난이 초고가 전세로 확산되는 것이다.

 5일 서울시의 전세거래 동향 자료에 따르면 보증금 10억원 이상인 전세거래 신고건수가 올 들어 지난달 말까지 202건으로 집계됐다. 전세 동향 조사가 시작된 지난해 1년간의 109건보다 배가량 늘었다. 올해 가장 비싼 전셋집은 지난 3월 거래된 강남구 삼성동 아이파크 195㎡형(이하 전용면적) 16층으로 보증금이 19억원이다. 지난해 최고 전셋값은 17억5000만원이었다.

 


지역별로는 대부분 강남구와 서초구에 몰려 있다. 강남구가 지난해 57건, 올해 99건이고 서초구는 지난해와 올해 각각 46건과 96건이다. 나머지는 용산과 목동에 일부 있다.

 이들 전셋집의 매매가격은 대부분 20억원 이상이고, 주택형은 모두 전용면적 85㎡가 넘는 중대형이다.

 10억원 이상 전셋집이 많이 늘어난 것은 고급주택의 전셋값이 뛰었기 때문이다. 서초구 반포동 반포래미안 퍼스티지 전용 168㎡형은 지난 6월 전셋값 12억8000만원에 거래됐는데 지난해 3월 전셋값은 5억8000만원이었다. 1년 3개월 사이에 두 배 이상 올랐다. 지난해 2월 9억원이었던 인근 반포자이 132㎡형도 올해 5월에는 10억5000만원으로 상승했다.

 주택시장 침체 영향으로 고급주택을 찾는 전세 수요도 많이 늘었다. 중대형 집값의 약세가 두드러지면서 자금 여유가 있는 수요자들도 매입 대신 전세로 돌아서고 있는 것이다. 초고가 전셋집들의 매매시세는 지난해 이후 단지에 따라 수억원씩 빠졌다.

 반포동 부동산명가공인 박순애 사장은 “크고 비싼 집들이 찬밥 신세인 마당에 수십억원씩 나가는 집들도 가격 하락 불안감이 크다”며 “불확실한 집값 전망에 매입을 포기하고 전세로 살려는 경향이 강하다”고 말했다.

 전세는 1년에 수천만원에서 수억원까지 나가는 재산세·종합부동산세 등 보유세 부담도 줄일 수 있다.

 고급주택의 좋은 주거환경을 찾아 전세로 사는 경우도 많다. 초고가 전셋집들은 교육·교통·문화 등 입지여건과 커뮤니티가 뛰어난 단지들로 꼽힌다. 특히 대치동·반포동 등의 비싼 전셋집에는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거액의 보증금을 마다하지 않는 부모들이 적지 않다.

 대치동 대치센트레빌공인 이규정 사장은 “교육환경이 좋은 단지들의 경우 들어오고 나가는 시기가 비슷해 수요자가 많아 대기자 목록을 만들어 놓을 정도”라고 말했다.

 분산투자를 위해 비싼 집에 돈을 묻어두기보다 전세를 살기도 한다. 강남에서 10억원대 전셋집에 사는 중소기업가 이모(56)씨는 “전세로 살면서 집 구입자금으로 들어갔을 돈의 일부를 다른 곳에 투자해 사업자금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세수요에 비해 초고가 전셋집 물량은 부족하다. 초고가 집들은 집 주인들이 대부분 실제로 거주하고 개인적인 사정으로 전세로 나오는 집이 드물기 때문이다.

 신한은행 이남수 부동산팀장은 “최근 경제력이 좋은 고객들로부터 초고가 주택에 대한 전세문의가 많이 들어오고 있다”며 “초고가 주택시장도 실속 위주로 재편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권영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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