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수사한다 → 안 한다 → 한다 … 줏대 없는 검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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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석
사회부문 기자

“수사를 안 하겠다는 게 아니고 절차를 하나하나 다져나가면서 수사를 철저히 하겠다는 말이었다.” 28일 기자들을 마주한 서울중앙지검 간부는 이국철 SLS그룹 회장의 금품로비 의혹 사건에 대한 검찰의 입장을 이같이 정리했다.

“수사할 것이 없다”는 지난 26일 발언과는 정반대로 해석될 수 있다. 불과 이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지난주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21일 이 회장의 폭탄발언이 알려진 직후 검찰이 선택한 첫 번째 기조는 ‘신속한 수사’였다. 서울중앙지검은 23일 그야말로 전격적으로 이 회장을 소환 조사했다.

그 배경에 한상대 검찰총장의 결단이 있었다는 게 검찰의 설명이다. 외부에서 먼저 제기된 의혹 사건에 대한 대응으로는 이례적일 정도로 신속한 조치였다.

 하지만 주말이 지나면서 검찰의 태도는 180도로 변했다. 서울중앙지검 관계자는 26일 “현 단계에서는 수사할 것이 없다. 이 회장도 재소환할 계획이 없다”고 말해 기자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이 말은 수사를 안 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됐다. 여기에 “의혹 대상자들을 상대로 확인한 결과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는 청와대 관계자의 이날 발언이 오버랩되면서 수사가 이대로 마무리되는 것 아니냐는 해석까지 나왔다.

 하지만 27일 이명박 대통령이 “대통령 친인척이나 측근일수록 엄격하게 다뤄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이들을 머쓱하게 했다. 같은 날 서울중앙지검에 대한 국정감사장에서도 야당은 물론, 일부 여당 의원까지 철저한 수사를 촉구했다.

검찰은 또 한번 옷을 갈아입었다. 28일 권재진 법무부 장관은 “고위 공직자나 대통령 친인척 및 측근 비리에 대해 성역 없이 신속하고 철저하게 수사하라”고 검찰에 지시했다. 서울중앙지검 관계자의 발언이 “수사 안 한다”에서 “수사한다”로 바뀐 데는 이 같은 배경이 있었다.

 검찰은 모처럼 ‘판’을 주도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잡았지만 오락가락하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등 떠밀려 수사하는 구태를 반복하게 됐다. 대한민국 검찰사(史)는 검찰이 이런 사건에서 미적거리면 정권과 함께 죽고, 과감하게 파헤치면 국민과 함께 산다는 사실을 여러 번 보여줬다. 검찰이 명백한 ‘진리’를 애써 외면하는 우(愚)를 또다시 범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박진석 사회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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