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컴퓨터업계 유행어 점점 확산

중앙일보

입력

요즘 미국 첨단기술업계에서 승자가 되려는 사람들이 먹는 아침 식사는 콘 플레이크가 아니라 ‘개밥’인 것 같다. ‘자신이 만든 개밥을 스스로 먹다’(eating your own dog food)는 표현이 유행인 것을 보면 그럴 법도 하다. 그 표현은 마치 집안 곳곳에 널려 있는 개털처럼 신문 헤드라인, 컴퓨터 전문지, 회사 중역들의 TV 인터뷰 등 어디서나 등장한다. 최근 인터넷 컨설팅회사 iXL 엔터프라이지즈의 한 대변인은 “우리가 만든 개밥을 우리가 먹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마이크로소프트社나 시스코社의 직원들도 그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

사실 실제의 개밥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듯 그 표현의 정확한 뜻과 유래는 불분명하다. 그렇지만 또다른 유행어를 빌리자면 분분한 설들을 ‘파고 들어’(drill down) ‘알맹이 수준’(granular level)까지 연구해볼 가치는 충분히 있다. 업계 전문용어란 인터넷 속도로 변하는 세계에 뒤처지지 않고 있음을 동료나 고객들에게 보여주는 ‘촌철살인’의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이같은 유행어는 주기가 매우 짧아 마이크로소프트社의 경우 사보에 최신 유행어를 설명하는 정기 칼럼까지 실을 정도다. 최근 거기에 등장한 용어는 ‘업무 유도(柔道)’(work judo)였다. 업무를 회피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면서 자기 일을 슬그머니 다른 사람에게 떠맡기는 기술을 가리키는 말이다.

샐러리맨의 애환을 풍자한 만화 딜버트를 창작한 스콧 애덤스에 따르면 전문 유행어는 아무 것도 아닌 생각을 권위 있는 것처럼 들리게 해준다. 애덤스는 “‘아이디어를 하나 냈으니 잘리지 않을 것 같다’는 말보다 ‘나의 정신적 자원을 고객에게 초점을 맞춘 기회의 공간에 진취적으로 집중시켰다’고 말하는 것이 낫지 않은가”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자신이 만든 개밥을 스스로 먹다’는 표현은 누가 만들어 냈을까. 디지털 이퀴프먼트社 출신으로 현재 마이크로소프트의 수석 연구원인 고든 벨의 작품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벨에 따르면 그 표현은 자사가 개발한 소프트웨어나 상품을 성능 향상을 목적으로 시험적으로 직접 사용해보는 것을 가리킨다. 벨은 “우리가 개발한 개밥이 먹으면 배탈이 나는지, 또 맛은 어떤지 알려면 직접 먹어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벨은 자신이 기존의 마케팅 용어를 업데이트한 것 뿐이라고 생각한다. 마케팅 컨설턴트 앨 라이스는 ‘개들이 개밥을 먹을까’란 표현은 개밥 광고를 둘러싼 토론 과정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한다. 그 표현은 어떤 상품을 직접 사용하지 않을 수도 있는 소비자에게 상품을 판매하는 상황을 설명하는 것을 가리켰지만 이미 오래 전 원뜻에서 벗어나 다양한 맥락에서 사용돼 왔다. 현재는 소비자가 특정 상품을 구입할 지 여부를 토론할 때 흔히 사용된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는 개의 식성이 전혀 까다롭지 않다는 점이다. 벨은 “고양이라고 하는 게 더 나을 것”이라고 말했다.

‘자신이 만든 개밥을 스스로 먹다’는 표현은 온라인 주식거래자가 온라인 증권사의 주식을 매입할 때도 사용된다. 또 개밥의 질에 집착한 나머지 몸소 먹어보는 개밥 판매자의 경우처럼 판매자가 제품의 특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때도 사용된다.

용도가 어떻든 ‘개밥’이란 표현은 듣기 좋은 말이 아니다. 그 표현을 즐기는 실리콘 밸리에서는 결국 소비자를 개로 생각한다는 뜻이 되지 않을까. 실리콘 밸리에 위치한 미래연구소 소장으로 그곳 문화를 오랫동안 관찰해온 폴 새포는 전통적으로 컴퓨터 업계는 소비자를 존중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는 “소비자를 ‘사용자’로 부르는 산업은 컴퓨터 업계와 콜롬비아 마약산업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런 무례함도 용서해야 할 것 같다. 요즘 실리콘 밸리는 미국 자본주의의 핵심 견인차로서 적자생존과 동족상잔의 처절한 경쟁을 치르고 있지 않은가.

미국 첨단업계의 유행어

마이크로소프트社는 사보를 통해 직원들에게 회사 안팎에서 쓰이는 유행어를 설명해준다. 최근 거기에 오른 몇 가지 유행어를 소개한다.

케이터링 와스프(Catering wasps): 배달된 음식을 회의 중에도 먹는 백인. 회의가 끝날 때까지 먹지 않고 기다리는 ‘케이터링 맹금류’(Catering vultures)와 혼동하지 말 것.
얼굴편지(Facemail): 기술적으로 낙후된 통신방식. 보이스메일이나 전자우편보다 뒤떨어진 것으로 대의 얼굴을 보며 직접 말하는 행위.
섬유 매체(Fiber media): ‘희망이 없을 정도로 한물간’ 종이에 인쇄된 자료.
죽음의 행진(Death march): 신제품 출시까지의 카운트다운. 오랜 시일이 걸리며 ‘평평한 음식’(flat food·동료 직원의 개인 사무실 문 아래로 건네받을 수 있는 자판기용 요리)이 필수적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